• title: 20-21 써드아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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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6일 14시 59분

유벤투스 역사에서 가장 많은 골을 합작해낸 스트라이커 듀오

 

산 시로에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찾아왔고 27분이 남아있는 경기는 득점이 없는 상태였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는 젠나로 가투소와 맞섰다. 밀란의 집행자는 그를 최대한 골대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델 피에로는 좌우로 움직이며 때를 기다렸고, 왼발을 휘둘러 다비드 트레제게를 향한 크로스를 시도했다.

 

가투소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뻗어 그 시도를 막아냈고 공은 회전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번개와도 같이, 델피에로는 몸을 돌려 아치를 그리며 오버헤드 킥으로 페널티 지역을 향해 공을 보냈고, 그 곳엔 공간을 향해 빠져나간 트레제게가 완벽한 쇄도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인은 로쏘네리 골대를 지키던 디다 앞으로 뛰어올라 헤더로 공을 골대 안에 떨어뜨렸다. 트레제게는 곧바로 그의 파트너에게 달려가 무릎으로 미끄러지며 함께 세레브레이션을 했다. 델피에로도 그를 껴안았고 이것이 비안코네리 팬들에게 알려주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타이틀이 토리노로 돌아오고 있다.

 

일 년 후 유벤투스의 이 스쿠데토는 이탈리아 축구의 근간을 뒤흔든 칼치오폴리 스캔들로 인해 박탈되었다. 이탈리아 축구의 황금 시대는 끝났고 유베는 FIGC의 처분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되었으며 바겐 세일이 예고되었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 5명의 핵심 선수가 흑백의 줄무늬에 남아있었다. 꾸르바 시레아의 울트라스는 그들을 '다섯 사무라이; 파벨 네드베드, 지안루이지 부폰, 마우로 카모라네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다비드 트레제게'로 일컫는다. 그들은 잔류했고, 비안코네리가 이전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을 돕기로 결심했다.

 

파비오 카펠로가 레알 마드리드 복귀를 타진하며 유벤투스를 떠났을 때, 델피에로에겐 안도가 찾아왔다. 훗날의 잉글랜드 감독은 이전 시즌에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를 26차례나 벤치에 앉혔다. 그는 다시 복귀하여 트레제게와의 호흡을 재가동시켰다. 이 듀오는 토리토 팀이 세리에 B 시절을 짧게 끝낼 수 있도록 보장했고, 팀은 한 시즌만에 다시 이탈리아 축구 정상권으로 복귀했다.

 

트레제게의 이탈리아 축구 데뷔는 잠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테르담에서 있었던 유로 2000 결승에서 그가 넣은 결승골은 레 블뢰에 1998년 월드컵 왕관에 이어 유러피안 타이틀도 선사했다. 그의 왼발 드라이브슛은 이탈리아의 1968년 이후 첫 유로 우승을 앗아갔다. 하지만 팬들이 애정을 담아 부르는 이름인 트레제골은 대회 전에 이미 토리노행을 확정지어놨으며, 그는 이탈리아에 첫 발을 내딛기도 전에 먼저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다비드 트레제게는 프랑스의 루앙에서 태어났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조르제는 아르헨티나 태생이었으며 아르헨티나 수도의 여러 팀에서 수비수로 경력을 남겼다. 트레제게의 아버지는 1974년 도핑 테스트 통과에 실패한 후 출전 금지를 당했다. 후에 사면되었지만 그의 커리어는 다시 복구하지 못했다. 아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와 축구 세계 간의 관계는 여전히 열려있었으며 트레제게가 겨우 8살일 때 클럽 아틀레티코 플라텐세와 계약에 성공한다.

 

어린 나이에도 트레제게는 양 발로 공을 잘 차는 걸로 꽤 유명했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난 건 1995년 고국 프랑스에 복귀해여 모나코에서 훗날의 짝 티에리 앙리와 짝을 이루면서부터였다.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는 2,000만 파운드로 트레제게를 스타디오 델레 알피로 데려와 라 베키아 시뇨라의 흑백 유니폼을 입었던 프랑스인 레전드 미셸 플라티니와 지네딘 지단의 발자취를 따르게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계획대로 되진 않았으니, 새 감독은 델피에로와 필리포 인자기의 조합을 선호하여 트레제게를 벤치에 묵혀두었다.

 

부분적인 출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은 찬스가 왔을 때를 놓치지 않았고 데뷔 시즌에 15골을 넣는데 성공했다. 안첼로티가 밀란으로 떠나고 마르셀로 리피가 그 자리를 대체했을 때, 그는 트레제게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인자기는 물려났고, 트레제골이 들어왔다. 그리고 세리에 A 사상 가장 위대한 파트너쉽이 탄생했다.

 

델피에로의 이야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코넬리아노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 브루나는 어린 아들을 극도로 보호했다. 그의 형 스테파노는 삼프도리아에서 짧게 뛰었으며 동생과 비슷한 정도의 전망을 보여줬따.

 

전기공이었던 아버지 지노가 힘들게 일하고 쉴 때면, 알레산드로는 산 벤데미아노의 집의 주차장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하지만 노파심 많은 브루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린 델피에로가 축구를 하다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 아들을 골키퍼로 전향시켰다. 그러나 동생을 더 많이 봐온 형 스테파노는 어머니에게 그를 더 전방에서 뛸 수 있게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녀의 관용은 어린 알레가 토리노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까진 이르지 못했다. 집에서 너무 멀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의 예방책은 스카우터 피에로 아그라디가 파도바 감독 아드리아노 부포니에게 그를 추천하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이 감독은 14살의 델피에로와 계약했고, 그를 부모님 슬하를 떠나 77km 떨어진 이탈리아 베네토로 데려갔다. 이 이적은 델피에로에게 기적이 되어-그는 괄목상대했다- 18세에 세리에 B 메시나전에서 데뷔하기에 이른다.

 

파도바에서의 첫 풀 시즌동안 단 한 골이라는 슬로우 스타트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가 연락을 해왔다. 라 베키아 시뇨라의 레전드이자 회장인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는 스타디움 투어와 트로피룸 구경으로 18세 소년을 현혹시켰다. 그리하여 이 팀과 저 선수의 19년간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유베의 오너였던 지안니 아넬리가 베르나르디노 디 베토를 따라 붙인 핀투리키오라는 별명의 선수는 정상의 리그에서 188골을 넣었다.

 

델피에로 주위에 유벤투스에는 지안루카 비알리부터 인자기까지 스타들이 차고 넘쳤다. 유벤투스 초창기 델피에로에게는 쉽고 잦은 성공이 찾아왔으며, 세 번의 스쿠데토, 한 번의 코파 이탈리아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 메달, 이 모든 것을 그의 첫 다섯 시즌만에 우수수 획득했다. 하지만 두 번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 패배에 실망이 찾아왔고, 인자기와의 파트너쉽도 허우적댔다. 이 시기 델피에로는 70주 연속 오픈 플레이에서 무득점이라는 충격적인 기록을 남겼다.

 

트레제골의 꾸준한 성장은 인자기를 잉여자원으로 만들었다. 트레제게는 프랑스에 올 때 처럼 이탈리아에 왔으며, 현지 언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축구로 말을 대신했다 2001-02 시즌은 그의 베스트였다. 개막전에서 2골을 넣었고 브레시아전에선 완벽한 해트트릭을 보여줬다. 양 발로든 머리로든 쉽게 골을 넣는 그의 능력은 희귀한 능력이었지만 비안코네리 팬들은 그 진가를 모르고 있었다. 꾸르바 시레아에선 불만족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으며 팬들은 트레제게의 플레이 스타일이 팀의 플레이 스타일을 저하시키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었다. 트레제게가 나올 땐 더 실용적인 축구를 구사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3파전을 펼치던 스쿠데토 레이스가 마지막 날에 유벤투스로 향한 시즌, 델 피에로도 유벤투스 통산 100골을 달성하며 기념비를 작성했다. 시즌 막판 인테르는 6점차로 유벤투스를 리드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격차는 1점으로 좁혀졌고 3위 로마와도 2점차밖에 나지 않았다.

 

인테르, 유베, 로마 모두 마지막 경기가 원정 경기였다. 유베는 우디네세에서 일찌감치 트레제게와 델피에로의 골로 2-0 리드를 잡으며 제 할 일을 다했다. 유베는 3시즌 연속으로 아깝게 우승을 놓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골로 앞서가든 네라쭈리는 라치오의 반격으로 전반전을 2-2로 마치게 됐다.

 

유베는 순항했고 로마는 토리노와 득점없이 비기면서(역주: 후반전에 로마가 이겼습니다), 스쿠데토가 토리노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인테르가 후반전에 2골을 더 내주며 3위로 추락하며 타이틀 레이스가 끝났다. 트레제게는 세리에 A 최고 선수상,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을 독차지했고 그의 올라운드 득점 능력은 델피에로의 시야와 기교에 완벽히 부합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피아첸자의 다리오 후브너가 예상치못한 폼을 보이며 24골을 넣어 그와 카포칸노니에레를 공동 수상한 것이다.

 

그 다음 시즌 트레제게에겐 부상이 닥쳐와 고질적인 무릎 문제에 고통받았지만, 그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넣은 4골은 이탈리아 팀간의 결승을 만들었다. 이 골 중엔 4강 레알 마드리드 전에서 카시야스가 막은 델피에로의 슛을 재차 차넣은 귀중한 어웨이골이 있었다. 하지만 결승은 비안코네리에게 뼈아팠다. 흥미진진한 0-0 경기를 마친 후 승부차기에서 첫 키커로 나선 트레제게는 실축했다. 그의 약한 슛은 밀란 골대에 있던 디다의 정면으로 향했다. 유베는 챔피언스 리그 도전의 마지막 허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차질에도 불구하고, 듀오의 파트너쉽은 계속해서 꽃피웠다. 트레제게는 계약을 연장했다. 델피에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불과 4일만에 열린 코파 이탈리아 바리전에서 교체로 나와 아름다운 칩슛을 넣으며 비안코네리의 심장에 자리잡았다. 칼치오폴리 스캔들의 몰락과 강등조차 이들을 떼어놓지 못했다. 돌아온 세리에 A에선 2008년 득점왕을 서로 경쟁하며 기운을 복돋았다.

 

이 둘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줄 예가 있다. 우승은 인테르의 것으로 확정되었고 유벤투스는 3위가 확실시되고 있었다.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트레제게와 델피에로 모두 19골로 득점 선두에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세리에 득점왕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였다. 시작 6분만에 델피에로가 팀에 리드를 줬고, 득점 랭킹에서 그의 스트라이커 파트너를 앞서갔다.

 

델피에로가 페널티킥을 얻어냈을 때 모두 이 레이스는 끝난 줄 알았다. 지정 키커였던 델피에로는 공을 집어 트레제게에게 넘겼고, 그는 무난히 성공시켜 다시 동률을 이뤘다. 어쩌면 합리적이게도, 델피에로가 다시 득점하여 37경기 21골로 그의 첫 카포칸노니에레를 타낸다.

 

비록 유럽 무대에서의 두통은 계속되었지만 이 파트너쉽은 유벤투스에서 10년간 지속되었으며 토리노에 많은 트로피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2008년 41골을 합작해내며 오마르 시보리와 존 찰스의 단일 시즌 득점 기록을 넘어섰고,  자신들이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잠재력있는 듀오 중 하나로서 남을 것임을 단호히 역설했다.

 

del piero trezeguet mila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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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hesefootballtimes.co/2018/08/31/alessandro-del-piero-and-david-trezeguet-the-most-prolific-strike-duo-in-juventus-history/

Profile
title: 20-21 써드아케 Lv.52 / 87,162p

Win the 57th match.
제 글은 당사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추천 자제좀ㅠ 알림이 너무 많이와요..

댓글 6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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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추천
1
울 아부지가 .
축구 이야기만 하시면
독일의 전차군단 시대를 이야기하시며
베켄바워를 늘 이야기하시는데 참 즐거워보였어요
저도 시간이 지나면
옛날에 알레제게라는 투톱듀오가 잇었는데
아주 최강이었지 하겟죠 ?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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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Latte'n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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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Ice ro. Juddem y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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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제가 유벤투스 팬하게된 듀오입니다.

그 담이 네디옹과 카모라네시

젼 델피레오 인자기투톱부터 봤는데...
음 그당시는 좀 인자기를 보낸게 아쉬웠지만 지금은 엄청 그립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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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제가 유베팬하면서 좋았던 투ㅌ톱이죠 제가 알레형을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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