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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9일 16시 28분

 

10번은 축구에서 신성시된다. 그 전통과 전임 선수들의 명성 때문에 크나큰 중압감을 지닌 번호다. 100년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벤투스는 이 사실이 가장 잘 맞는 클럽이다. 33회(*칼럼 작성 당시 기준)의 스쿠데토와 두 번의 유럽 챔피언을 지낸 이 전설적인 이탈리아 팀에선 세계 최고의 선수들 이 전설적인 번호를 대변했다.

 

이탈리아와 세계의 스타들에 더해 무려 세 명의 발롱도르 수상자가 이 유니폼을 입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파울로 디발라가 지난 여름 세리에 A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 번호를 받았을 때, 그는 인스타그램으로 이 번호가 클럽과 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클럽이 내게 등번호를 바꾸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내가 달았던-대표팀에선 달고 있는- 21번을 떠나는 게 옳은 일인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21번은 내가 많은 트로피를 들 수 있게 도와준 각별한 번호고 지단과 피를로같은 정상의 선수들이 달았던 번호다. 하지만 10번은 특별한 번호고 영광인 번호다. 유벤투스와 그 역사에 있어 위대한 유대와 책임감을 가진다. 오마르 시보리, 미셸 플라티니, 로베르토 바지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카를로스 테베즈, 폴 포그바같은 많은 챔피언의 어깨에 있던 번호다. 내게 등번호 10번은 단지 어린 시절의 꿈일 뿐 아니라 내가 모든 경기, 모든 대회, 모든 트로피를 이기고 얻을 수 있길 원하게 해주는 것이다."

 

디발라의 포스트는 여전히 거대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번호에 대한 러브레터였다. 또한 수 십년 동안 얼마나 위대한 선수들이 이 번호를 달고 이 클럽의 역사를 만들어왔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일이기도 했다. 디발라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즌이 시작되자, 24세의 디발라는 첫 7경기에서 12골을 넣었다. 그 후엔 득점 가뭄을 겪었지만 강력한 스타트로 유벤투스가 라이벌 나폴리, 인테르와 함께 순위권 정상을 다툴 수 있도록 도왔고, 7연속 리그 타이틀을 향한 관문을 열었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같이 이 번호를 달았던 전 유벤투스 선수들은 이 번호가 어떤 즐거움을 가져오는지, 혹은 어떻게 짐이 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있다. 2012년 8월 작별 기자회견에서 델 피에로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다음 선수가 10번에 대해 나보다는 덜 짐스럽게 느끼기를 바란다. 누가 이 번호를 이어받든 나처럼, 아니 나 이상의 영광스러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이룬 것이 너무나 많기에 이 번호를 절대로 결번시키지 않겠다. 이렇게 어떤 어린이든 10번 유니폼을 입는 날을 꿈꿀 수 있어야한다."

 

유벤투스는 결번을 고려했지만 델 피에로는 클럽에게 이 번호를 남겨두어 미래의 스타가 입을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번호는 클럽과 유럽무대에서 깊숙히 뿌리내린 번호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면 이 번호에 배정된 인상적인 선수의 목록을 볼 수 있다.

 

 

1980년, 아일랜드 태생의 리암 브래디가 아스날을 떠나 비안코네리로 왔다. 이 이적은 1970년대의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 조치 이후 이탈리아 클럽이 다시 외국인 선수 영입을 허가했음을 알리는 랜드마크였다. 브래디는 유베에서 두 시즌만을 뛰었지만, 그의 시간은 여전히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그는 두 번의 리그 타이틀을 따냈고, 1982년엔 15분을 남긴 카탄자로전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1-0으로 승리해 스쿠데토를 확보했다.

 

천재 감독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의 지도 아래 , 브래디의 영웅 면모는 그의 두 시즌에 모두 결정적이었다. 그는 시즌 후반기 13승 1무 1패의 호성적을 이끌며 브라질 스타 파울로 로베르토 팔카오가 이끄는 로마를 손쉬게 제압하고 우승을 이뤘다. 플레이메이커로서 브래디는 팀의 보석이었고 로베르토 베테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가장 치명적인 공격진을 구성했다.

 

브래디는 수비수를 앞지르는 능력과 박스 내 어디서든 골을 넣을 수 있는 능력으로 팀 내 최다골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팀 동료 중 7명이 그 해 여름 월드컵을 들어올린 이탈리아 대표팀 선발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대단함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유베 20번째 우승이었던 81/82시즌 스쿠데토를 가져다준 그의 골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시즌이 끝나기 한 달 전에 브래디는 그가 클럽을 떠날 것이란 것을 알았다. 플라티니의 영입과 보스만 룰 이전 외국 선수 선발을 두 명으로 제한했던 규칙에 따른 것이었다. 외국인 선발의 다른 한 자리는 즈비니엑 보니엑이 차지하고 있었다.

 

토리노를 떠나야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팀이 피오렌티나를 넘어서 두 번째 별을 유니포에 새겨넣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탈리아 스포츠 일간지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전 에디터 칸디도 칸나보는 다큐멘터리 유벤투스의 위대한 이야기La Grande Storia della Juventus에서 "그것은 페어플레이의 위대한 모범이었고 브래디가 얼마나 신사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그것 또한 그의 주요 임무였지만, 그는 그것을 열정과 기쁨으로 해내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선수이고 신사인지 또한 보여주었다."

 

브래디는 마지막까지 진정한 신사였다. 경기 후 드레싱 룸에서 샴페인에 흠뻑 젖은 브래디의 앞에 마이크가 드리워졌다. 그는 2시즌간 2번의 우승을 한 것과 멋진 마무리에 대한 소감을 질문받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난 매우 행복하고 아주 즐겁지만, 이 사람들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슬프다. 그들은 진정한 챔피언이다." 그의 대답이었다.

 

platini juventu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브래디가 두 시즌간 놀라움을 보여줬지만, 미셸 플라티니는 같은 번호를 달고 더욱 좋은 활약을 보였다. 초기에 플라티니는 대부분의 이탈리아 선수들이 막 월드컵을 우승하고 온 팀에 적응하는데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가 싶었다. 당시 유벤투스엔 파올로 로씨, 마르코 타르델리, 클라우디오 젠틸레, 안토니오 카브리니, 가에타노 시레아 등이 있었다. 

 

유베는 유러피안 컵 결승에 다다랐지만 함부르크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위안삼을 수 있었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은 1980년대에 올 성공의 조짐이었다. 유벤투스는 84,86년 세리에 A 우승을 거뒀고 84년 컵위너스 컵, 85년 유러피안컵, 인터컨티넨탈컵을 들어올렸다. 플라티니는 82년부터 85년까지 세 시즌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83,84,85년에 올해의 유럽 선수로 호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소속으로 84년 안방에서 열린 유로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그 과정에서 9골을 넣었다. 유벤투스 오너인 지안니 아넬리가 플라티니를 영입하려했던 의도는 값어치를 했다. 팬들이 브래디에 대하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었든 간에 그것은 플라티니 시대를 대표하는 트로피의 연속으로 지워졌다. 85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플라티니가 지배하던 때의 클라이맥스였지만, 이 우승은 헤이젤 참사로 인해 빛이 바랬다.

 

이후 유벤투스는 시들한 시기를 견뎌야했다. 동시에 10번을 입은 선수들은 그에 걸맞는 역량도 기대치도 보여주지 못했다. 87년부터 90년까지, 루이지 데 아고스티니와 지안카를로 마로키가 10번을 달았지만 재능있는 이탈리아 선수였을 뿐 결코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지 못했다. 이 시기는 나폴리, 밀란, 인테르가 리그를 지배하던 때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의 선수였으며 유벤투스가 영입에 실패했던 바 이쓴 디에고 마라도나가 나폴리에서 유벤투스를 능가하고 있었다. 아리고 사키가 지도하는 밀란 또한 반 바스텐, 루트 굴리트, 레이카르트로 이뤄진 오렌지 삼총사로 백투백 유러피안 컵을 달성했다.

 

baggio juventu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90년 피오렌티나에서 로베르토 바지오를 영입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일 디빈 코디노는 당시 세계 기록인 8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적을 옮겼고, 이 딜이 공식발표되자 피렌체의 길거리엔 폭동이 일었다. 그가 유벤투스에서 보낸 5시즌 동안 바지오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93년 UEFA 컵 우승과 95년 스쿠데토-코파 더블을 달성했다.

 

그는 93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시보리와 플라티니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 해 여름, 바지오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94년 월드컵 결승에 올랐지만, 브라질과의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그의 슈팅이 크로스바 위로 넘어ㅏ고 말았다. 95년 클럽은 떠오르는 어린 신성 델 피에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그를 밀란으로 매각했다.

del piero juventu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델 피에로는 바지오에게서 물려받은 번호를 94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8년간 달았고, 이것은 그를 클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 델 피에로가 10번을 달았던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공식전 705경기에 뛰어 클럽 기록인 290골을 넣었고 6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95/96시즌 유벤투스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는 동안 21살의 델 피에로는 6골을 넣었다. 96년 말 발롱도르는 독일 수비수 마티아스가 수상했고 델 피에로는 3위에도 들지 못했다. 98년 그는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로 선정됐지만 발롱도르에선 팀 동료 그 해 여름 월드컵을 우승한 지네딘 지단에게 밀렸다. 그의 실력과 꾸준함, 그리고 2006년 월드컵 우승 멤버였음에도 그는 이 상을 끝까지 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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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시즌엔 아무도 10번을 달지 않았다. 델 피에로 없는 첫 시즌, 유벤투스는 우승을 했지만 득점 랭킹 10위에는 아무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다음 시즌 이 번호는 테베즈가 차지했다. 당시 테베즈는 그의 정점에 있었다.

 

테베즈가 리그 3위에 해당하는 19골을 넣으며 유벤투스는 다시 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그는 다음 시즌에도 이 번호를 달고 스쿠데토-코파 더블을 이뤄낸다. 테베즈가 보카 주니오르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후 이 번호는 폴 포그바에게 향했다. 그는 6번에서 10번으로 등번호를 변경하며 플라티니 이후 처음으로 10번을 단 프랑스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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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그바는 단 한 시즌(15/16시즌) 10번의 주인공이었고 모든 기대를 충족시켰다. 3년전 유벤투스에 와서 팀의 팡파르가 된 그는 이 시즌에 마침내 자신의 이탈리아 생활 최고 기록을 이룬다. 그는 12 어시스트로 이 시즌 세리에A 에서 도움왕이 되었고 드리블 돌파 횟수도 리그 2위에 올랐다. 이전의 프랑스 선수와는 달리, 시즌이 끝나고 맨유로의 복귀를 결정한 포그바에게 팬들은 화가 났다.

 

디발라가 10번을 받기 전, 새로 영입된 페데리코 베르나르데스키가 이 번호를 고사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오렌티나에서 유벤투스로 온 선수인 바지오와 비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바지오 같은 선수는 없다. 내 의견으로는 비교는 언제나 옳지 않다. 바지오는 아마도 역대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선수일 것이다. 그는 그것을 보여줬고, 따라서 난 내가 그와 비교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바지오에게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dybala juventus 10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디발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도전을 택했다. 우승에 질리지 않는 이 팀에 그가 또다른 우승이나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봐야한다. 디발라는 최근 클럽의 공식 홈페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번호를 다는 것은 한없이 즐거운 일이다. 델 피에로는 이 번호로 수많은 성공을 거뒀고 누구도 유벤투스에서 그걸 다시 해낼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난 내가 그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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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hesefootballtimes.co/2018/01/09/from-savory-to-dybala-juventus-and-the-fabled-number-10-shi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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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자제좀ㅠ 알림이 너무 많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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