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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5일 10시 59분
2편에서는 본격적으로 계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한가지 언급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등번호]
고정 등번호는 1995-1996 시즌에 시작되었습니다만, 그렇다면 등번호는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까요.
일반적으로 국가대표팀간의 경기는 1944년부터 (확실한것은 아닙니다.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이때도 사용한 국가도 있고 안한 국가도 있었습니다.) 사용되었고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것은 확실합니다.), 월드컵에서는 1950년 월드컵에서 등번호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당시는 고정등번호가 아니었고, 1954 월드컵부터 고정등번호였습니다.
클럽 리그 경기에서의 등번호 도입에 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되어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어서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조사를 해본 결과, 이탈리아 Serie A의 경우 1938-1939 시즌에는 부분적으로 도입한 팀도 있고 아닌팀도 있었고, 1939-1940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 역시 부정확할수도 있는데, 1939-1940 시즌 아니면 1938-1939 시즌임은 확실한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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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시즌 유벤투스 경기 사진. 유벤투스 유니폼에 5번 등번호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따라서 저는 1939-1940 시즌을 시작점으로 하겠습니다. (이 때가 시작점이라고 보는 자료들이 더 많습니다.)


초기에는 포지션별로 선수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등번호가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처럼의 상징성은 없었겠죠. 10번 포지션에 해당하는 선수가 10번 유니폼을 입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포지션이 공격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포지션이었고, 그 결과 유명 선수들이 10번을 입는 경우가 많아지다보니 자연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상징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펠레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봅니다만, 그 이전 1940년대 그란데 토리노의 핵심인 마쫄라나 1950년대 매직 마자르의 핵심 푸스카스도 10번이었던것을 감안하면 10번은 먼 예전부터 핵심 선수들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선수들의 10번의 상징성은 후대의 10번과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대로 10번은 공격형 미드필더 혹은 세컨 스트라이커, 즉 전술적으로 공격을 이끄는 역할을 하는 선수의 몫이었으므로 시기별 유벤투스의 공격 에이스들이라고도 볼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후대의 위대한 계보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유벤투스의 10번 계보의 총 역사를 알아두는 것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벤투스 10번의 원조]
본격적으로 알아볼텐데 1939-1940 시즌 이전에 등번호가 있었더라면 10번을 달았을, 사실상 유벤투스 10번의 원조격인 선수를 한명 소개하겠습니다.

아시는분들도 계시겠지만, 초기 축구는 2-3-5 전술이 기본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여기서 약간 변형을 한 2-3-2-3 시스템으로 30년대 세계 축구를 지배했습니다.
(1930: CI 우승, 1932: CI 준우승, 1934: WC 우승, 1935: CI 우승, 1936: OG 금메달, 1938: WC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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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핵심이 되는 것은 두명의 2였구요. 일반적으로 가장 핵심이 되는 선수가 10번, 두번째 선수가 8번이었습니다. 1940년대 토리노와 대표팀을 이끌던 2명인 마졸라와 로이크의 경우에도 마졸라가 10번, 로이크가 8번이었죠. 쉽게 생각해서 메씨가 10번 달고부터 리켈메가 8번 달던것도 비슷하다면 비슷할수도 있겠네요. 이러한 형태는 적어도 이탈리아내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934, 1938 월드컵 2연패동안 포쪼 감독은 주전을 모두 바꿨습니다만 2대회 연속 주전으로 나섰던 선수가 딱 2명 있었습니다. 바로 8, 10에 해당하는 선수였는데요. 그 중 한명은 상대적으로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경기장 이름으로도 남아있고 펠레, 마라도나에 비견될 선수였다는 쥐세페 메아짜가 10번에 해당하는 선수였습니다. 나머지 한명 8번에 해당하던 선수가 유벤투스의 10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지오반니 페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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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최고의 공격 콤비였던 지오반니 페라리와 쥐세페 메아짜]

대표팀에서는 8번에 해당하는 선수였지만 (재밌는 것은 메아짜는 소속팀에서는 오히려 센터포워드인 9번격의 선수였습니다. 대표팀에서는 스키아비오, 피올라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다보니 10번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죠.) 유벤투스에서는 10번의 역할을 맡았고, 이탈리아 역사에 단 3차례밖에 없는 리그 5연패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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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페라리 (GIovanni FERRARI)는 1907년생으로 알레싼드리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30-1931시즌 유벤투스로 이적했고, 이 시즌부터 유벤투스의 공격을 이끌며 유벤투스의 리그 5연패 달성에 기여했습니다. (이것은 Serie A 출범이후 유벤투스의 첫 우승이기도 했습니다.)
지오반니 페라리는 통산 8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는데 이것은 지금도 최다 우승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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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935 시즌 리그 5연패를 달성한 유벤투스 선수단. 윗줄 왼족에서 6번째가 페라리]


[최초의 유벤투스 No.10]
등번호가 도입된 1939-1940 시즌의 유벤투스 10번의 주인공은 딱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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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카포카살레 (Francesco CAPOCASALE)가 모든 경기에 10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카포카살레는 바리에서 활약한 이후 바로 이 시즌부터 유벤투스에서 활약했습니다. 강력한 슛이 장점이었던 선수였다고 합니다. 다만 그는 2시즌만 활약하고 다른팀으로 옮깁니다.


[1940년대]
유벤투스는 리그 5연패를 기록한 1935년 이후 1949-1950시즌까지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합니다. 2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감독의 교체도 잦았고 그만큼 선수단의 교체도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토리노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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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매시즌 10번의 주인공이 달랐습니다. 감독도 거의 매시즌 바뀌었으니 그것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그중 대표적인 선수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944년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임시로 열린 시즌입니다. 전쟁 참전 등으로 선수단 구성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시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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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 루쉬타 (Riza LUSHTA)는 알바니아 출신의 선수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유벤투스에서 활약하며 95경기 56골을 기록했습니다. 키는 작지만 (172cm) 좋은 기술을 지녔던 선수였고, 9번과 10번을 오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실제로 1941-1942 시즌에는 9번으로도 많은 경기를 뛰었습니다. 1942-1943시즌에는 전시즌과 감독이 바뀌고 쥐세페 메아짜가 가세하면서 다시금 10번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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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센티멘티 (Vittorio SENTIMENTI)는 그의 형제 5명이 모두 축구를 했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넷째인 루치디오 센티멘티와 그는 1940년대 유벤투스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루치디오 센티멘티는 아주리 주전 골키퍼이기도 했습니다. 비토리오 센티멘티는 유벤투스에서 1941년부터 1949년까지 활약하며 210경기 62골을 기록했습니다. 미드필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던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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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3시즌 유벤투스 선수단. 윗줄 맨왼쪽이 리자 루쉬타, 아랫줄 맨왼쪽이 비토리오 센티멘티]
이 시즌 두 선수가 동시에 출장할 경우 루쉬타가 10번, 센티멘티가 8번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욘 한센 (John HA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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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대표팀 상대로 잘했던 선수들을 곧바로 영입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유로 2000 결승에서 골든골을 넣었던 트레제게와 유로 2004에서 이탈리아를 탈락시킨 기적과도 같은 골을 기록한 이브라히모비치를 곧바로 영입했던 것이 그 사례였는데요. 이것이 최초가 아니었습니다.
1948 런던 올림픽 8강에서 (당시는 올림픽도 A매치로 인정되던 시기였습니다.) 이탈리아 상대로 4골을 기록하며 5대3 승리를 이끈 욘 한센의 플레이에 당시 젊은 회장이었던 지안니 아넬리는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 덴마크 선수를 유벤투스로 데려왔습니다. 욘 한센은 1948 올림픽에서 군나르 노르달과 함께 득점왕에 올랐고,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적 첫 시즌 초반에는 부상과 적응문제로 출장하지 못했으나 점차 출장시간을 늘리면서 본인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1949-1950시즌에는 28골을 기록하며 득점 3위, 1951-1952시즌에는 3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는 등 득점능력에도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유벤투스에서 6시즌동안 189경기 124골을 기록했고, 5연패시절 이후 다시금 유벤투스에 2차례 스쿠데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료에서 보시다시피 6시즌동안 유벤투스 10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유벤투스 10번 계보를 크게 요약해본다면 장기간 유벤투스 10번의 주인공으로 머물렀던 첫 주인공이라 볼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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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데토를 차지한 이후 1950-1951 시즌 유벤투스 선수단. 윗줄 네번째가 No.10 욘 한센.]
아랫줄에 주장 보니페르티도 보이는군요.



[이후 3시즌]
욘 한센이 떠난 이후 3시즌동안 유벤투스는 최악의 시기를 보냅니다. 3시즌 리그 순위가 7, 12, 9위였습니다. 10번의 주인공도 매시즌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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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가담이 좋았던 덴마크인 Helge BRONÉE와 드리블이 좋았던 아르헨티나인 Raúl CONTI는 각각 한시즌씩 활약하고 유벤투스를 떠났습니다.
특히 리그 12위를 기록했던 1955-1956 시즌에는 누가 No.10이라고 말하기 힘든 시즌으로 팀 자체도 정말 총체적 난국에 빠졌던 시즌입니다. (34경기 8승 17무 9패, 무벤투스였네요)



그리고 다음 시즌 유벤투스는 드디어 새로운 No.10을 얻고 부활하게됩니다. 그부분은 3편에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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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해주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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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10 Lv.31 / 14,522p
댓글 12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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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여지없이 추천이구여. 페라리는 정말 축구잘하게 생겼네요 ㅎㅎ
이니에스타 많이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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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예전부터 10번은 중요한 번호였군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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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부족한 제게 단비같은 지식 감사합니다 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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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좋은자료네요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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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이탈리아10님 반가워요 ㅠㅠ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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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추천수 10의 위엄 쩌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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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좋은 글 감사드려요. 아는 선수는 없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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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이런 정보를 어디서 구하시는지... 대단하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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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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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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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와 이런 정보들 어디서 구하시나요? 대단하시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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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물도 성지물 한 번 가보는 거 갠찮다 생각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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