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19일 14시 22분


이름: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죠)
출생지/국적: 칼도노 VI,비첸자/이탈리아
생년월일: 1967년 2월 18일
키: 174cm
몸무게: 73kg
별명: Roby,Codino Divino(Divine Ponytail)
클럽: Vicenza,Fiorentina,Juventus,A.C. Milan,Bologna,Inter Milan,Brescia
포지션: 스트라이커/공격형 미드필더
백넘버: 10(유벤투스 시절)
아주리니 출장/득점: 56/27
수상기록: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3위
               1993년 FIFA선정 올해의 선수
               1993년 올해의 유럽 선수
               1993년 UEFA컵 우승
               1994년 미국 월드컵 2위
               1995년 세리에A 리그우승(94/95시즌)
               1995년 코파 이탈리아 우승(94/95시즌)
               1996년 세리에A 리그우승(95/96시즌)


Season  Team  Cat  Championship
      Appear. Goals

1982/83 Vicenza C1 1 -

1983/84 Vicenza C1 6 1

1984/85 Vicenza C1 29 12

1985/86 Fiorentina A - -

1986/87 Fiorentina A 5 1

1987/88 Fiorentina A 27 6

1988/89 Fiorentina A 30 15

1989/90 Fiorentina A 32 17

1990/91 Juventus A 33 14

1991/92 Juventus A 32 18

1992/93 Juventus A 27 21

1993/94 Juventus A 32 17

1994/95 Juventus A 17 8

1995/96 A.C. Milan A 28 7

1996/97 A.C. Milan A 23 5

1997/98 Bologna A 30 22

1998/99 Inter Milan A 23 5

1999/00 Inter Milan A 19 4

2000/01 Brescia A 25 10

2001/02 Brescia A 12 11

2002/03 Brescia A 32 12

2003/04 Brescia A 26 12

Total 489 Games 218 Goals



여러분은 축구를 알게된 계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이 축구가 진정 가장 재미있는 구기종목이라 느낄수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에 한 선수를 댈 수있다. 로베르토 바죠. 그로 인해 축구를 알게되었고,축구를 느낄수 있었다. 나는 이 선수의 프로필을 쓰기전에 한가지 당부해두려 한다.

Fiorindo,Matilde. 세계 축구계의 별이자 전설을 낳아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67년 2월 18일. 이탈리아안의 비첸자 칼도노란 작은 마을에서 전설이 시작된다. 지안나,월터,카를라,죠지오,마리아가 있던 바죠 형제들에 새식구인 로베르토가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로베르토는 축구를 사랑했고,축구만을 생각했으며,축구없이 살 수없는 축구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졌던 아이었다. 그런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에 로베르토의 아버지는 그에게 축구화를 신을 수있는 기회를 주었고,로베르토는 9살의 어린나이에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몇번의 경기를 치루고 난뒤,로베르토는 팀의 작은 별이 되어있었다. 그는 항상 득점에 성공했고 그가 나선 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결국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스카우터 안토니오 모라는 그를 세리에C 소속인 비첸자에 입단시키기위해 그의 부모를 설득했다.

그렇게 어린나이의 로베르토는 비첸자에 영입됬다. 그러나 비첸자의 유스팀 감독인 캐드(Cad)는 로베르토에게 경기장에서 뛸 수있는 시간을 그리 많이 주지않았다. 그렇게 그의 첫시즌은 경기장 한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채 끝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 곧 희소식이 들렸다. 전 시즌 감독이 물러나고 새로운 감독이 비첸자를 맡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안에서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로베르토는 그 기회를 놓치지않고 비첸자의 회장 브루노 죠지 앞에서 자신의 프로선수 첫골을 넣었고 그것은 또한 위기에 있던 팀에게 중요한 골이었다. 게다가 로베르토는 시즌내내 작년과 비교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그것은 팀내에서의 입지 뿐만아니라 16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는 영광까지 가져다 주었다.
그가 처음으로 아쭈리의 푸른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었다.


영웅의 탄생

84/85 시즌. 그는 이미 팀에 중요한 선수로 자리매김했고 29경기에 출전 12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세리에B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그는 세리에B로 승격한 친정팀 비첸자에 머무르지 않았고,이듬해 5월 더 큰 무대인 세리에A의 피오렌티나에 새 둥지를 틀었다.



자신감이 넘쳤던 그에게 세리에A의 무대는 너무나 큰 벽이었을까? 첫 시즌 그는 단 한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단 한번의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못한 것이었다. 바로 다음 시즌인 86/87시즌 그는 처음으로 세리에A 무대를 밟게되는데 1986년 9월 21일 삼프도리아전이었다. 하지만 아뿔사.. 그는 자신의 첫 경기에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무릎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제 막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무산되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길고 긴 회복기간을 거쳐 1987년 5월 10일 두번째 기회를 얻는다. 상대는 당시 강호였던 나폴리. 경기내내 좋은 컨디션을 보여준 그는 결국 자신의 세리에A 데뷔 2년만에 첫골을 당당히 신고했다.

희소식은 그 다음시즌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피오렌티나의 감독은 그를 선발선수로 기용했고,로베르토는 놀랍게도 27경기에 출전 6골을 집어넣으면서 감독의 기대에 보답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88년 11월 로마에서 펼쳐지는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이탈리아 대표선수로 뽑히며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또 그는 그와 오랫동안 사귀고있던 연인 안드레이나와 결혼에 골인하며 프로선수로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로베르토는 다음시즌 리그에서 처음으로 30경기이상을 출전했고 두자리수의 골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팀을 웨파컵 결승에 올려놓았는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토리노의 강팀인 유벤투스를 맞아 패배하며 결국 우승컵을 피렌체에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웨파컵 우승팀인 유벤투스는 상대선수로 좋은 활약을 보여준 바죠를 £17m의 가격으로 영입한다. 이 이적에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분노했고 팀의 핵인 바지오를 데려간 유벤투스에게 거센 시위까지 벌였다. 거리는 온통 바죠와 유벤투스의 얘기뿐이었고 난동이 일어났다.(당시 바죠의 유벤투스 이적 파동은 지금까지도 두 팀 사이에 앙금으로 남아있다.)

어쨋든 로베르토의 클럽에서의 좋은 활약은 그를 자국 월드컵 대표선수로까지 이끌어준다. 그러나 당시 1990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인 안젤리오 비치니 감독은 바죠를 선발선수로 기용하지 않았다. 비록 본선 1차전과 2차전을 모두 1-0으로 승리했으나 경기력이 좋지못하다 생각했던 비치니 감독은 결국 만족스럽지 못한 팀의 선발 공격진을 전격교체한다. 교체선수는 바죠와 스킬라치였다. 체코와의 경기서 그 둘의 호흡은 성공적이었다. 팀의 승리와 동시에 로베르토는 이 경기서 월드컵 역사에 기록될 아름다운 골을 넣었다.(바죠의 월드컵 1호 골)



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을 위해 나폴리로 날아간 이탈리아 대표팀의 비치니 감독은 경기에 앞서 '바죠는 이번 경기에 나서지 않는다. 그는 피로해 있다.'라며 그를 쉬게하려 했지만 바죠는 '나는 23살이다. 그라운드 위에서 쓰러지더라도 경기를 뛰고싶다.'라고 비치니 감독에게 강하게 어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후반전에 투입되었다. 바죠가 투입된 이탈리아는 공격에 활기를 찾았고 많은 찬스를 얻었지만 득점에는 실패한다. 그렇게 1-1의 팽팽한 승부는 연장전에 돌입했고 그 균형은 120분간의 사투끝에도 끝나지 않아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고 말았다. 바죠는 승부차기에서 이탈리아의 키커로 나서서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지만 승리의 여신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3,4위전서 영국을 꺾는 데에는 역시 바죠와 스킬라치가 중심에 있었다. 바죠는 재치있는 골로 선제골을 뽑아냈고 후반말미에 페널티까지 얻어내 결국 팀을 2-1의 짜릿한 승리로 이끌었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서 바죠가 선발로 나왔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긴 대회였지만 이탈리아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이후 다시금 세계 축구의 정상궤도에 설 수 있었던 의미깊은 대회였다.


天上天下唯我獨尊



1990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이 끝난 후. 바죠는 새 둥지를 튼 이탈리아의 강호 유벤투스에서의 첫 시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팀 분위기나 선수시스템면에서 피오렌티나보다 월등히 앞서있는 유벤투스에서 그는 월드컵 3위의 아쉬움을 빠르게 잊을 수 있었고,훈련에 집중했다. 더이상 신예가 아닌 그의 플레이는 이제는 세리에A를 장악할만큼 높아져 있었다. 그는 유벤투스에서의 첫 시즌에 33경기에 출전 14골을 성공시켰고 공격의 윤활유인 플레이메이커로서도 최고의 합격점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에 그토록 아이들을 애지중지 사랑한다는 바죠에게 첫째 아이인 발렌티나가 태어났다. 아이가 생기면서 축구에 더 집중할수 있었던 로베르토는 다음 시즌인 91/92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큰 부상없이 32경기에 출전하며 지난 시즌보다 4골 더 많은 18골을 집어넣었다.



1992/93시즌은 바죠에게도 그리고 유벤투스에게도 최고의 시즌이었다. 그는 동료선수들의 골을 생산해 내는 것 뿐만아니라 자신의 골 결정력도 이미 절정에 올라와있었다. 리그에서 27경기에 출전 21골이라는 본인의 프로데뷔후 최다득점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또한 웨파컵에서도 바죠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는 무려 웨파컵 9경기에 출전 6골을 성공시켰고,그 골들 모두 중요한 순간들에 터져나왔다. 결국 그는 팀에게 웨파컵 우승을 선사했고 그것이 그의 프로데뷔 첫번째 우승타이틀이었다. 결승 상대팀이었던 독일의 강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강팀이었지만,바죠가 이끄는 유벤투스에겐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당시의 웨파컵 규모는 지금의 챔피언스 리그와 비슷할 정도로 수준이 높던 때 였다.



다음 해인 1993/94시즌은 바죠에게 잊을 수 없는 또하나의 기쁨의 순간이 다가온다. 1993년 10월 31일 펼쳐진 제노아와의 리그 10라운드 경기서 해트트릭을 도합해 세리에A 데뷔 9시즌만에 100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제노아의 골키퍼도 그를 축하해주었고,모든 사람들은 이제 바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또한 92년 반 바스텐이라는 또 하나의 축구영웅이 받은 FIFA주관 올해의 세계 선수상을 93년에는 바죠가 받았다. 그야말로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축구선수로 등극한 것이었다. 동시에 93년 올해의 유럽 선수상까지 거머쥐며 거칠 것이 없는 해였다. 그렇게 영광의 시간들은 흘러갔고 바죠는 자신의 두번째 월드컵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이탈리아 국민들의 기대를 받는 바죠는 자신의 둘째 아이인 마티아의 탄생을 축하해할 틈 없이 미국으로 향해야했다.


바죠 월드컵

8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 일컬어졌던 AC밀란의 명장 아리고 사키 감독의 휘하아래 이탈리아 대표팀은 그 어느때보다 강해보였다. 선수진은 우수했고,역시나 그 중심엔 바지오가 서 있었다. 그러나 실상 본선에서 아일랜드에게 결정타를 맞은 이탈리아 대표팀은 연이은 경기에서도 흔들렸다. 결국 이탈리아의 명예에 걸맞지 않는 와일드 카드로의 진출이 결정되었다.



팀이 부진할때 역시나 바죠도 부진했던 것이다.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있던 바죠를 언론과 국민들은 질타했다. 그 와중에 16강전이 펼쳐졌고 상대는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였다. 경기 시작 후에도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이탈리아는 첫 골을 나이지리아에게 헌납했다. 이렇게 패배하면 역사상 최악의 순간을 맞보게되는 이탈리아는 벼랑끝에 내몰렸다. 그렇게 시작한 후반전의 이탈리아 공격진은 바죠를 축으로 다시금 경기에 집중했고,계속해서 나이지리아의 수비진을 공략했다. 그때였다. 오른쪽에서 내준 짧은 패스를 받아 바죠가 그대로 밀어넣은 것이었다. 기적적으로 동점골을 뽑아낸 이탈리아는 결국 경기를 연장까지 끌고갔고,베나리보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바죠가 차 넣으면서 2-1의 짜릿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바죠의 활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8강에서 아쭈리를 기다리는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이었지만 기세등등했던 이탈리아에겐 무리였다. 로베르토와 같은 성을 지닌 디노 바죠가 첫번째 골을 넣었지만 후반전에 카미네로가 동점골을 만회했다. 그렇게 경기막바지까지 동점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은 계속됬다. 그러나 이탈리아엔 로베르토 바죠가 있었다. 후반에 교체해 들어온 쥐세페 시뇨리가 몸을 던지며 노마크 찬스에 있던 바죠에게 패스했고,바죠는 골키퍼를 제치며 골을 성공시켰다. 87분. 또한번의 기적이 바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상 이 경기에서 터진 극적인 골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말총머리의 바죠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번 터진 바지오의 득점력은 준결승전에도 이어졌다.



이미 아르헨티나라는 강팀과의 경기서 패해 결승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었던 바죠는 그 누구보다도 경기에 집중했다.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는 대회의 복병이었고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바죠는 경기시작 20분께 불가리아의 그물을 갈랐다. 왼쪽에서 도나도니의 스로인을 받은 바죠는 그 공을 컨트롤없이 그대로 드리블,오른쪽 모서리에 꽂아넣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불가리아의 수비진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공간을 내주었고,첫골이 터진지 5분만에 알베르티니의 환상적인 칩패스를 받은 바죠가 이번엔 반대편 모서리쪽 그물을 흔들었다. 미국의 더운 날씨에 완벽히 적응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그 이름에 걸맞는 빗장수비와 빠른 역습에 이은 득점을 보여주었다. 후반전이 시작됬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됬다.



후반 중반 불가리아의 수비진을 휘졋던 바죠가 반칙을 당했고 그것이 부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 큰 부상이 아니길 바라면서 시뇨리와 교체된 바죠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온다. 한골을 만회한 불가리아를 2-1로 꺾은 이탈리아는 결승전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올라온 브라질과 피할 수 없는 승부를 해야했다. 82년 월드컵 로씨의 해트트릭으로 브라질을 4강의 문턱에서 좌절시켰던 이탈리아는 이번에도 그때의 기운을 이어가길 원했다. 하지만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도 경기에 나서야했던 바죠는 경기내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이탈리아의 공격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두가 기억하는 바죠의 페널티킥 실축(물론,바레시와 마사로의 PK실축도 포함해)을 끝으로 월드컵 준우승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그 이후 언론은 바죠를 공격했고 월드컵이 끝난 몇달 뒤에도 계속해서 바죠는 괴로움에 시달려야했다. 더군다나 실축을 빌미로 사키감독과의 사이도 멀어지고 말았다. 기삿거리만을 취재하기 바쁜 기자들과 언론 매체들은 벼랑끝에 섰던 이탈리아를 누가 결승까지 이끌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시련기



월드컵에서의 부상은 그 다음 해에도 계속 이어졌다. 바죠는 94/95시즌 17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본인에게 저조한 8골만을 기록했다. 그 시즌에 유벤투스는 리그와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중심엔 바죠가 아닌 '신성' 델 피에로가 서 있었다. 또한 그가 처음 유벤투스에 입단할 당시 받았던 주급의 1/3이 삭감된 주급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팀에 남았다.

하지만 이미 팀은 델 피에로 중심의 공격전술을 내세웠고,더이상 유벤투스에 바죠가 설 자린 없었다. 월드컵의 악몽이 다시금 그를 덥친 것이었다. 팀에서의 입지가 확연히 줄어든 바죠를 데려가기위한 클럽들의 경쟁은 그때부터 시작됬다. 유벤투스와 더불어 세리에A의 강팀인 AC밀란과 인터밀란은 많은 팀들 중 바죠 영입에 가장 주력했고 선택권은 바죠에게 주어진다. 결국 바죠는 AC밀란행을 택했고 1995년 7월 6일. 정들었던 토리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밀라노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그것은 바죠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당시 AC밀란의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그를 주전으로 내세울 계획이 없었고,그는 서브멤버로 전락하고 만다. 바죠는 교체출장을 포함해 리그에서 28경기에 출전했지만 단 7골에 그치고 말았다. 1995/96시즌 AC밀란의 리그우승에 그는 중심으로 설 수 없었다.



다음 시즌인 96/97시즌이 시작되기전 카펠로는 팀을 떠났고,새 감독인 타베레즈가 도착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선발선수로 자리잡은 바죠는 시즌내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과 맞물려 시즌이 끝날즈음에 AC밀란은 타베레즈 감독을 경질하고 아리고 사키감독을 밀라노로 다시 부른다. 거의 적에 가까웠던 사키감독 밑에서 바죠는 부진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한다. 경기출전의 기회뿐만 아니라 자신감 마져도 점점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바죠는 기회를 잡을 수 없는 팀에서 떠나기로 결심했고,97년 7월 18일자로 군소팀인 볼로냐로의 이적을 감행한다.


No More Ponytail



심기일전. 바죠는 볼로냐행을 택하면서 마음속으로 한가지 다짐했다고 한다.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그렇다. 자신이 프로선수로 데뷔이래 맞아야했던 지난 2년간의 흠집아닌 흠집들은 그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리고 바죠는 자신의 3번째 월드컵을 위해 모든것을 버리고 볼로냐행을 택한 것이었다. 주전이 되서,골로써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 그것은 그의 축구인생중 어쩌면 가장 현명한 판단이였을지 모른다. 이제는 자신이 하고픈 축구가 아닌,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팬들의 몫을 해내야 된다는 사명감을 느낀 바지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말총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삭발을 하며 마음부터 가다듬었다. 초지일관의 자세로 시작했던 97/98시즌은 말그대로 그가 다짐했던 모든 것을 전부 보여주었다.



군소팀인 볼로냐에서 그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스웨덴의 케넷 안데르손,러시아의 이고르 콜리바노프,이탈리아의 폰톨란 그리고 수비수였던 파라마티까지..모두의 힘이 시즌전 이루고자했던 바를 좀더 가깝게 해주었다. 22골의 기록은 97/98시즌 득점왕을 차지한 독일의 비어호프에 고작 5골밖에 모자른 수치였다. 결국 그런 그의 노력의 결실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체사레 말디니호에 포함되는 선물로 돌아왔다. 또한 98년 월드컵이 끝난 후,그가 1년전 어쩔수없이 떠나야했던 산 시로 구장을 다시금 밟을 수 있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 실패의 원인을 결과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델 피에로와 바죠의 공존이었다. 각각 10번과 18번의 등번호를 배정받고 출전한 델 피에로와 바죠가 버티는 이탈리아 대표팀은 사실상 본선팀들중 가장 강한 공격진을 갖춘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체사레 말디니 감독은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바죠는 월드컵 스타답게 프랑스에서 빠르게 적응해가는 한편,델 피에로는 부진을 거듭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대표팀 공격진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됬다. 본선 1,2차전에 출전해서 1골 1어시스트의 좋은 활약을 펼쳤던 바죠를 말디니 감독은 16강전부터 갑자기 델 피에로와 교체한 것이었다. 한참 물이 오른 바죠의 골에 대한 감각은 감독의 결정에 무뎌지기 시작했고,그것은 결국 이탈리아에게 8강 탈락이라는 아픔을 주었다.



사실상 말디니 감독의 이론은 나쁘지 않았으나 결론적으론 델 피에로가 16강 경기에 별다른 활약이 없었기때문에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더군다나 공격포인트 없이 부진했던 델 피에로를 결승행의 교두보였던 8강 프랑스전에 선발로 출전시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뒤늦게 투입된 바죠는 결정적인 슛팅을 보여주었지만 아쉽게 골대를 지나쳤다. 그 사이에 이미 시간은 흘러만 갔고,승부차기에 돌입했다. 94년 월드컵의 쓰디쓴 실축을 걷어 차는 듯 골을 성공시킨 바죠였지만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은 다시금 이탈리아를 외면했고 결국 그것으로 바죠의 세번째 월드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Return of Fantasy



프랑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이미 거취를 옮긴 바죠는 곧장 밀라노에서의 훈련에 돌입했다. 그가 옮긴 팀은 이번엔 AC밀란이 아닌 더비 라이벌팀인 인터 밀란. 당시 새 시즌을 준비하던 인터의 공격진은 바죠를 포함해 브라질의 득점기계 호나우두가 있었는데 그 둘의 호흡은 가히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비록 호나우두의 십자인대 부상으로 같이 오랫동안 뛰지못했지만 잠시나마 정말 위력적인 화력을 뿜어냈다. 어쨋든 팀의 분위기면에서나 타이틀에 대한 개인 욕망에서나 어느 때보다 활활 불타오르던 바죠의 98/99시즌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나서 호나우두-바죠 라인은 그리 많이 볼 수 없었다. 스쿠뎃토에 대한 두근거림 이었을까? 바죠는 예상 밖으로 시즌 초반 불안정한 모습을 잇따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죠는 챔피언스 리그서 벼랑끝에 몰린 팀을 극적으로 살려내는데에 성공한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같은 조에 속한 레알 마드리드와의 1차전 원정경기서 2-0의 뼈아픈 패배를 당해야했던 인터는 홈경기서 승리하지 못하면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하는 상황이었다. 1998년 11월 25일 산 시로에는 전운이 감도는 찬바람이 불고있었고 그 사이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초반 레알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야하는 상황이 왔고 산 시로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팀의 보이지않는 수훈이었던 칠레의 스트라이커 사모라노가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었다.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물들었고 사람들은 끝까지 현장을 주시했다. 80분이 넘어서자 패배의 징조가 인터의 스코어를 엄습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점점 초조해졌다.

83분..84분..85분...그때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그 순간에 바죠가 역전골을 터뜨린 것이었다. 침착하게 슛팅 공간을 만들어낸 상황에서 바죠다운 골을 넣은 것이다. 넉아웃 스테이지는 아니었지만 팬들은 한 골을 더 넣어줬음하는 욕심이 들었다. 승점차이 때문이었다. 전광판은 4분의 추가시간을 주었고 또 한번의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정확히 94분께 바죠가 상대 골키퍼와 1대1 상황을 맞이했고 침착하게 골키퍼를 제치면서 네라쭈라들이 내심바라던 추가득점에 성공한 것이었다. 산 시로는 바죠! 바죠! 바죠!를 계속해서 외쳐댔고 경기는 인터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종료되었다. 98/99시즌 인터 밀란은 매끄러운 시즌을 보냈지만 바죠,호나우두,사모라노의 연이은 부상에 의해 결국 아무 타이틀도 따내지 못했다.(수비도 더불어 부진했다.)



비에리라는 특급골잡이를 영입한 인터의 99/00시즌은 어느때보다 바빴다. 당시 모두가 바라는 투톱인 비에리-바죠 라인이 형성됬음은 물론 미드필더진도 전시즌보다 전력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바죠는 다시한번 불운을 겪어야 했다. 바로 4년전 자신을 유벤투스의 전력에서 제외시켰던 마르첼로 리피가 인터의 새감독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98년에 건너온 인터에서의 모든 계획은 바죠에게도 순조로웠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곧 리피감독과의 마찰이 생겼다.



지독히 악연을 유지했던 리피감독이 내세우는 전술은 바죠가 구상하는 전술과 부딪혔고,그것은 팀에게 손해로 다가왔다. 결국 바죠는 시즌내내 좋은 폼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것은 유로2000 이탈리아 대표팀에 차출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바죠는 끝까지 팀을 위해 온몸을 쏟아부었다.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경기서 파르마를 상대로 환상적인 두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났던 인터에서 그 경기를 끝으로 6월 30일 모든 계약이 종료되었다.



그 이후에 4달간 바죠는 선수생활에 있어 마지막 장소를 찾고있었다. 2000년 9월,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중위권 클럽인 브레시아와 계약을 맺는다. 바죠는 더 낳은 클럽에서,상위권에 있는 빅클럽에서 뛰기를 원했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고향팀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시즌이 시작되었고 유벤투스와의 경기를 가지면서 자신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브레시아는 가능성이 다분한 클럽이었고,동료선수들 또한 빅클럽에서 느낄수있는 열정을 지닌 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시즌 동안 클럽은 바죠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클래스..



브레시아에서의 3년 동안 바죠는 팀의 주장으로써 전술적인 면이나 선수들의 정신적인 면에 지주가 되어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론 3시즌간 리그에 70경기에 출전 33골이라는 그 나이에 믿기힘든 골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죠가 앞선 3시즌간 브레시아의 성공을 이끌 수 있는데에는 마쪼네 감독의 힘이 컸다. 마쪼네 감독은 바지오의 생각을 이해하고 믿어주었고 그런 환경속에 바죠는 나이를 잊은 듯 좋은 플레이를 할수있었다. 또한 팀 동료였던 비토리오 메로의 갑작스런 교통사고 소식은 그에게 더욱 큰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즌전 팀의 상승세에 또 하나의 전설이 영입됬는데 '펩' 스페인의 전설적인 미드필더 호셉 과르디올라였다. 그렇게 바죠의 브레시아는 수비에 안정감이 생기게 됬고 마음놓고 공격에 박차를 가할수 있었다. 새로이 영입된 선수는 과르디올라로 전부가 아니었다. 한창 실력이 상승하는 윙어 바치니와 아프리카의 '별' 가나의 아피아 수비수 페트루찌,칼로리,보네라,마르티네즈와 더불어 골키퍼 세레니까지..모두가 하나로 뭉쳤고 그 중심에 그들에게 절대적인 지원군이였던 바죠가 있었다.



그런 준비된 브레시아의 새 시즌이 다가왔고,바죠에겐 벌써 4번째 시즌이었다. 4년간 브레시아라는 군소클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바죠는 2003/04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결심한다. 그런 그의 생각을 매번 그를 배반했던 운명의 여신이 읽었던 것이었을까? 2004년 3월 14일 파르마와의 원정경기서 세리에A 200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골을 넣은 순간에 축구를 시작한 지난 22년간의 모든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관중들은 브레시아의 팬,파르마의 팬 할것없이 모두 일어나서 대기록을 작성한 영웅에게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들과 아픈 기억들을 모두 잊을 수 있는 가슴벅찬 희열의 순간이었다고 바죠는 그때를 회고한다. 그렇게 명예로운 순간은 어느때처럼 빠르게 지나갔고 그는 그의 마지막 경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2004년 5월 16일. 그의 클럽에서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경기가 산 시로에서 열렸다. 상대는 AC밀란이었고 너나 할것없이 경기시작전 바지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후반전 바죠가 교체되어 나가는 순간에 AC밀란의 주장 말디니를 비롯해 모든 선수진과 스탭진 그리고 관중들까지 모두 그에게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 그렇게 이탈리아 축구계에서..세계의 축구계에서 또하나의 가장 큰 별이 지는 순간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의 16강 패배소식을 접했을때 누구보다도 아쉬움과 슬픔을 느꼈던 사람은 로베르토였다. 2001/02시즌에 트라파토니의 대표팀의 일원이 되기위해 부상을 안고도 경기에 출전해 골을 기록했던 그는 결국,일본으로 향하는 대표팀의 일원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16강에서 한국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한 이탈리아 대표팀을 지켜보며 이탈리아의 국민들은 모두가 바죠를 다시금 떠올렸다. 바죠가 있었더라면..대표팀의 성적을 떠나 모두가 바죠를 뽑지않은 트라파토니 감독을 비난했다. 그 이후 2004년,바죠는 자신이 그렇게 열망하고 입고싶어했던 아쭈리의 푸른 유니폼을 다시 입을 수 있었다. 스페인과의 친선경기를 앞둔 대표팀의 감독 트라파토니가 마지막으로 바죠를 대표팀에 부른 것이다.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바죠는 그의 번호인 10번의 유니폼을 입고 대표팀에서의 마지막 경기에 원없는 플레이를 펼쳤다..



경기종료후 관중들은 떠나가는 이탈리아의 주장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그라운드 위에서 사라지는 한 명의 축구선수가 아닌 축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한 명의 이탈리언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Written by 춤추는알레
                                                                
Profile
춤추는알레 Lv.0 / 0p
댓글 33 건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5-11-19
정말 힘들게 각고의 노력을 다해 쓴 글인 만큼 많이 읽어주세요..ㅜ-ㅜ 정말 힘들었답니다..
프로필 이미지
트레골
2005-11-19
춤추는알레님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바조는 제가 97년에 태권도장 다닐 때 당시 사범께서 특히나 존경했던 선수였죠... 94 결승전 실축도 기억나고... 알레 전에 전 이 선수를 더 좋아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트레골
2005-11-19
그나저나 이 정보들을 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눈이 꽤 아프실 듯...수고하셨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5-11-19
세세한 것만 일부 구했구요. 전체적인 틀은 제가 알고있는 한도 내에서 풀어썼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Ale
2005-11-19
새로운정보도 알게됬고 잘읽었습니당..
바죠와 알레하면 뭔가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좋아할수밖에없는 존재 ㅠㅠ
프로필 이미지
2005-11-19
오호~ 알레님 글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2005-11-19
으아 퍼가도 되나요?
프로필 이미지
2005-11-19
바죠....

그의 플레이를 많이 보지 못한게 아쉽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GototheA
2007-05-19
'신성' 델 피에로
어색함?

혹시 월드컵때 패널티 성공하고
'쉿' 하는 제스쳐를 선보인 선수인가요?
그거 엄청 인상깊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머리가 바죠씨같기도 하고
프로필 이미지
2007-05-19
로베르트 바죠.....
94때 tv로 보고 와 잘한다 했는데 실축..
정말 칼치오의 전설이죠
프로필 이미지
2007-05-20
미쉘 플라티니와 함께 유베 최고의 레전드죠... 곧 알레와 네디도 이름을 함께하게 될겁니다 ㅋㅋㅋ
프로필 이미지
2007-06-01
98 월드컵 때 16강전부터 델 피에로가 선발로 나온게 아니죠. 바죠는 1,2 차전 선발 3차전 교체투입 16강전 벤치 8강 교체출장이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HolyPanda
2007-06-16
바죠 pk 생각하면

안구에 습기부터..

장문인데 수고많으셨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07-06-25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최고의 선수!!
아마 다시는 이런 선수가 태어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07-07-07
에효 그 승부차기가 도대체 뭐길래 -_-;;
프로필 이미지
2007-07-17
진짜 그 승부차기.....그래도 진짜로 영웅은 영웅.,..
프로필 이미지
2007-08-07
바죠에게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아픔들이 있었군요.. 덕분에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로비는 진짜 불멸의 영웅이네요..
우와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7-09-03
누가 뭐래도 당신은 울 유베레젼드♡_♡
프로필 이미지
2007-09-12
ㅠㅠ=b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7-09-15
로비옹 떴다...ㅠ _ ㅠ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7-09-19
또 뜨셨음 ...

감격 ㅠ ㅠ
프로필 이미지
2007-09-23
ㄷㄷㄷㄷㄷㄷ
프로필 이미지
2007-10-07
죠빈코에게 힘을 나눠주세요!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7-11-05
요즘 자주 뜨심 +_+
프로필 이미지
2007-11-17
뒤에서 넘어오는 로빙패스를 발리로 트랩할수 있는 몇 안되는 고감도 테크닉(98월드컵 칠레전 2001년인가 브레시아에서 유베전 반데사르 관광골;ㅅ;)의 소유자.. 아 로비형님... 코치로라도 유베로 와주면 안되시려나요? ;ㅅ;
프로필 이미지
춤추는알레
2007-12-05
그야말로 진정한 테크니션의 결정체..
프로필 이미지
2008-01-14
영원한 판타지..
프로필 이미지
JUV&ITA
2008-02-02
꽁지머라 바죠옹
프로필 이미지
JUV&ITA
2008-02-02
1.. 에러 에러 꽁지머리
프로필 이미지
2008-02-19
바죠옹.. 요즘뭐하시나염..
프로필 이미지
2008-02-22
1

은퇴하셨으니.. 장사나<<야

축구관련된일 하실듯함
프로필 이미지
2008-10-03
제1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죠
이동
겔러리 목록
출석체크
아이콘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