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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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일 12시 12분

도대체 어디에서 긁어왔던건진 기억이 안납니다.엘르(...)에서 쓴건데 saa에서 본건지 다른데서 본건지 기억도 안나네요.여튼 재밌는 글입니다.




이탈리아는 난해하다. 여자를 밝히는 재벌이 집권하는 그 나라에서는 소수에 집중된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전 피아트 그룹 회장 지아니 아넬리를 중심으로 한 아넬리 가문은 그런 모순과 신화의 중심에 있다. 이것은 아넬리들이 만들고 있는 바로크 풍의 가문 이야기다.::이탈리아, 럭셔리한, 로열, 지아니, 마르게리타 아넬리, 아넬리, 스프레짜투라, 루엘, 엘르, elle.co.kr::  

이탈리아에서 ‘아넬리’는 왕조와 동격이다. 아넬리 일가는 이탈리아 최대 자동차 메이커 피아트 제국의 통치자들로서 그들은 이탈리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타계한 수장 지아니 아넬리(Gianni Agnelli)는 비공식적인 ‘이탈리아의 왕’으로 불리며 피아트의 사업영역을 끝없이 확장시켜 나갔고, 야망에 찬 젊은 후계자들이 선대의 전설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새로이 등장했다. 지아니 아넬리를 중심으로 한 아넬리 일가의 비화는 이탈리아 자본주의 성장의 역사가 담긴 한편의 드라마다.

前史, 지오바니와 에도아르도 아넬리 
피아트가 거느리고 있는 수백계 계열사의 20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있다. “아넬리가 피아트이고, 피아트는 토리노이며, 토리노는 이탈리아다.” 슬로건이 말하듯 피아트는 토리노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9년 지오바니 아넬리는 동업자들과 함께 토리노에 자동차 공장을 세운다.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의 이니셜을 따서 FIAT로 명명된 회사는 이탈리아의 산업화와 더불어 번창했고 마침내 지오바니 아넬리가 1920년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아넬리 가문의 세습왕조가 시작된다. 그의 아들 에도아르도는 페루지아 귀족 가문의 비르지니아 부르봉 델 몬테와 결혼해서 장남 지아니를 비롯한 7남매를 두었다. 열렬한 축구광으로 토리노의 축구 클럽 유벤투스를 이탈리아 최고 명문 클럽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던 그는 1935년 43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화려한 등장, 지아니 아넬리   
아버지 지오바니로부터 피아트를 물려받지 못하고 숨진 에도아르도의 장남 지아니 아넬리(1921년생)은 토리노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변호사를 뜻하는 ‘아보카토’라는 닉네임을 얻는다. 대학을 마치자마자 그는 조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교로 군에 입대, 2차대전에 참전한다. 탱크 부대 소속으로 러시아 동부전선에 배치된 그는 두 번이나 부상을 입기도 했고 북아프리카에서 복무할 때는 술집에서 한 여성을 두고 독일 장교와 싸움이 붙어 팔에 총상을 입는 소동을 치르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항복한 이후에는 조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일조하고자 유창한 영어실력을 발휘, 미 점령군의 연락장교로 활동한다. 
1945년 지아니의 모친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데 이어, 2차대전 당시 독일 추축국에 협조한 혐의로 강제 퇴임한 조부 역시 유명을 달리한다. 조부가 회장으로 임명한 비토리오 발레타가 섭정 정치로 피아트를 이끌어나가는 사이 그는 백만 불 이상의 연 수입과 타고난 매력을 무기로 마음껏 인생을 즐겼다. 평생 이름 난 플레이보이였던 그는 재클린 케네디, 아니타 에크버그(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라 돌체 비타>에 등장하는 금발의 스웨덴 여배우), 실비아 몬티(이탈리아 여배우) 등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특히 대형 요트로 세상을 누비며 파티를 즐기던 젊은 시절 만난, 당대의 유명한 이혼녀 파멜라 해리먼(처칠의 며느리. 클린턴 행정부에서 프랑스 대사를 지냄)과는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누이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1952년 그가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가 심한 사고를 당하자 해리먼은 그를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이듬해 나폴리 공주 마렐라 카라춀로가 지아니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해리먼과의 5년에 걸친 연애도 막을 내린다.
마렐라는 모델이자, 사진작가이며 당대의 트렌드 세터였다. 논픽션 작가 트루먼 카포테는 마렐라를 뉴욕 사교계의 백조 4인방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보석이라고 일컬었고 사진작가 리처드 아베돈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타일 아이콘과의 결혼도 그의 여성 편력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마렐라가 둘째 아이 마르게리타를 임신했을 무렵, 지아니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렬한 관계에 빠져 있었다. 특히 외도의 상대가 지아니에 필적한 지위의 귀족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 관계는 아넬리 부부의 결혼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마렐라는 이혼을 결심하고 아르헨티나로 떠나버리기도 했으나 이들의 불완전한 결혼은 2003년 지아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 남편의 여성편력에 대해 마렐라는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아니에게 있어 여성은 정복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넬리의 성장, 피아트의 성공  
1966년 발레타가 물러나고 지아니가 회장에 취임한다. 발레타가 이탈리아 최초로 소형차를 대량생산하는 데에 주력한 반면, 미국의 현대적인 생산방식에 감명받은 지아니는 피아트의 저가 이미지를 쇄신하고 새롭고 큰 차를 유럽 시장에 내놓아 폭스바겐을 따라잡으며 피아트를 유럽 메이저 자동차 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소련과 남미에 공장을 열고 국제적 동맹과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등의 혁신적 마인드를 지닌 사업가였다. 소련의 공장은 직접적으로 돈이 되지는 않았지만 부수적인 이익이 엄청났다. 국제적 위신이 올라갔고 무엇보다 소련에서 굴러가는 수많은 차들이 피아트라는 사실이 그를 가장 흡족하게 했다. 1970년대 오일 쇼크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리비아의 국가 원수 카다피와도 기꺼이 손을 잡았다. 1970년대 말 일본 자동차의 등장으로 3년간 막대한 손실을 경험하자 유럽의 경쟁력을 높이고 자국 산업을 미국과 일본의 공세로부터 보호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가 이뤄낸 사업의 다각화가 그 발판을 제공해주었다.
1970~80년대에 피아트는 이탈리아 전역을 휩쓴 정치 폭력에 흔들렸다. 네 명의 간부가 사망하고 직원 27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중무장 호위대에 둘러싸여 움직여야 했다. 노조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한 그는 1980년대 노조의 파업에 맞서 4만여 명의 노동자 행진을 조직해 노조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공장에 진입시킨다.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노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이탈리아 정치, 경제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지아니 아넬리는 상원의원과 외무장관을 거친 누이 수산나를 이어 1991년, 종신 상원의원에 지명된다. 가문의 정치 슬로건은 ‘아넬리는 이미 모든 부와 권력을 지녔으므로 결코 매수되지 않는다’였다. 아넬리가 매수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다른 정치인을 매수했다는 의혹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 피아트의 뇌물 공여에 대한 조사가 벌어졌을 때 그의 고위 측근들이 투옥되기도 했으나 그는 일체의 부정 행위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국가에 궁극적인 손해를 입히면서도 오로지 일가의 배를 불리는 데 주력해 왔으며 정부는 일종의 책임 면제 회사인 피아트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노동법과 조세법을 손질해왔다고 비판한다. 즉 이탈리아가 점차 가난해지는 동안 아넬리 일가만 거부가 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의 경제적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그의 주식거래는 이탈리아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자회사들의 시가 총액은 250억불에 이르렀다. 

지성과 교양, 유머와 패션 감각을 갖춘 세기적인 멋쟁이
날카로운 지성과 교양을 갖춘 지아니는 특유의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인으로서 국제 은행가, 정치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빌더버그 그룹(전세계 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거물들의 모임으로 철저한 비밀 보안을 유지하며 막후에서 세계를 조종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음)의 멤버였던 헨리 키신저, 데이비드 록펠러 등과 가까운 친구였다. 록펠러는 지아니를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국제자문위원회에 임명하는 등 두 집안은 사업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아니는 이외에도 케네디, 포드, 유럽의 왕족, 소련의 정치국 등과 친분을 맺으며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이탈리아 역사의 주역으로서 이탈리아 경제의 전후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기업은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철학을 지켜온 그는 피아트의 사업 분야를 금융, 보험, 부동산, 화학, 항공우주, 통신, 군사장비, 제과, 주류, 언론에 이르기까지 크게 확장시켰다. 피아트 자동차는 페라리,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란치아를 총괄한다. 
큰 키에 기품 있는 외모, 사업과 정치, 예술에 대한 혜안을 두루 지녔던 지아니의 패션 감각은 옷차림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에서도 단연 두드러졌다. 남성복 디자이너 니노 체루티는 지아니 아넬리를 제임스 본드, 존 F 케네디와 더불어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로 선정했고 <에스콰이어>는 그를 역사상 최고의 드레서 Top 5에 선정했다. 그를 탁월한 패셔니스토로 만든 것은 그가 선택하는 액세서리와 그 착용 방식에 있었다. 그는 마지막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공들인 옷차림 위에 일부러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액세서리를 연출했다. 클래시컬한 카라체니 고급 맞춤 양복을 입고 손목 시계를 커프스 위에 차거나 넥타이를 비스듬히 맨다거나 맞춤 양복에 높은 하이킹 부츠를 매치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 같은 수고는 마치 무심하게 신경쓰지 않은 듯한 고도의 멋 부리기, 즉 ‘스프레짜투라’ 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방면의 대가였다. 그가 시도한 스타일은 전세계적으로 카피되었다. 열렬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그는 저택을 예술품으로 가득 채웠고 이외에도 항해, 스포츠카, 스키, 말의 애호가였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유벤투스의 구단주이기도 했던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유벤투스 회장에게 전화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유벤투스와 AC 밀란의 경기는 아넬리와 베를루스코니, 두 재벌의 라이벌전으로 비춰졌다.

장남의 자살, 자신의 타계, 그리고 분쟁의 시작   
지아니는 2003년 전립선 암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외아들은 그보다 3년 앞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다방면에 유능한 인물이었던 지아니에게도 무능한 일면이 존재했다. 그는 사랑과 정상적인 가족관계에 무능력했고 필요한 공식석상을 제외하고는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분리시킨 채, 수많은 여자 친구와 정부를 두고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두 아이 에도아로도와 마르게리타에게 가정의 불협화음은 낯설지 않았다. 남매는 부친의 사랑을 갈구했으나 그는 아이들에게 냉담했다. 한번은 마르게리타가 부친을 놀라게 하기 위해 머리를 밀었다. 그는 슬쩍 올려다 보더니 “내가 감명받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틀려서 안됐구나” 라고 말했다. 에도아르도가 어린 시절, 지아니는 헬리콥터를 타고 함께 유벤투스 경기를 보러가자고 약속했다. 아이는 몹시 들떠 옷을 차려 입고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아들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피아트 제국의 적법한 장자로 태어났음에도 에도아르도는 피아트 제국에서 주요한 역할을 할 인물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패밀리 비즈니스에 종사한 것은 잠시 유벤투스의 감독관을 맡은 것이 전부였다. 흡사 <대부>의 프레도를 연상시키는 에도아르도는 처음부터 부친의 대단한 기대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 지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아들의 소심한 성격을 못마땅해 했는데 그의 행보도 자신의 뜻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프린스턴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한 그는 인도를 여행했고 동양의 종교와 신비주의에 심취했다. 현재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만난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자본주의와 피아트를 비판했으며 가난한 자들을 찬미했다. 
아들을 포기한 지아니는 동생 움베르토의 아들 지오바니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하지만 1997년 그가 희귀한 암으로 33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자 지아니는 불과 21세의 존 엘칸(마르게리타의 맏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피아트와의 연관을 강경하게 거부하며 생득권인 막대한 부에 등을 돌렸던 에도아르도는 좌익계 신문 <일 마니페스토>에 피아트의 세습에 대한 코멘트를 남겼다. “내 가족은 바로크 시대의 퇴폐적인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 누구를 모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의 말을 상원의원에 임명했던 칼리굴라의 행동을 보는 것 같다.” 에도아르도는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으며 시설에 수용해버리겠다는 부친의 엄포에 시달렸다. 헤로인에 빠져있던 그는 부친의 고문들에게 손을 벌리는 영락한 신세가 되었다. 2000년 11월, 46세의 에도아르도는 자택 빌라솔레를 나서 토리노 외곽을 향해 자신의 피아트를 몰았다. ‘자살의 다리’로 불리는 가파른 고가 다리 위에 차를 세운 뒤 그는 6000미터 아래로 몸을 던졌다. 지아니는 경찰과 함께 아들의 유해 수습현장에 직접 참여했다. 에도아르도는 결혼하지 않았으나 1973년 사생아를 두었고 지아니는 끝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게리타 아넬리 VS 아넬리 일가  
“만일 내가 도덕적으로 강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오빠처럼 다리에서 몸을 던졌을 것이다.”
유산에 대한 정확한 내역 공개를 놓고 선친의 고문단과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는 마르게리타는 오빠처럼 사라지지도, 조용히 물러나 있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부친의 절대 신임을 받았던 고문들, 특히 가베티가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한다고 격렬히 비난한다. 그녀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가베티는 항상 주변에 있었으나 결코 그녀와 가깝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베티는 빈번히 두남매의 대리 아버지 역할을 했다. 에도아르도가 대학을 알아보러 미국 여행에 나섰을 때도 그가 동행했으며 그녀의 첫 남편인 알랭 엘칸을 피아트사에 데려온 것도 가베티였다. 19세의 마르게리타는 파리의 저명한 유태인 집안 출신으로 똑똑하고 잘생긴 25세의 청년 엘칸과 1975년 결혼한다. 가베티가 신랑의 들러리를 섰다. 
어린 시절부터 아넬리가의 제트세터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부친의 피아트 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존, 라포, 지네브라의 3남매를 두었다. 런던으로 이주한 후 1981년 남편과 이혼한 그녀는 홀로 어머니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상냥했으며 직접 요리를 해주었는데 이는 유모와 운전수의 손에 자랐던 그녀의 성장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곳에서 자녀가 다니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던 그녀는 러시아 백작인 세르쥬 드 팔렌을 만난다. 그들은 함께 브라질로 이주해 결혼했고 그녀는 남편을 따라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다. 두 사람은 5명의 남매를 두었는데 이 다섯 자녀들이 상속에서 배제되면서 법정 분쟁의 불씨가 잉태되었다.
부친의 유언장은 마르게리타가 없는 자리에서 공개되었다. 부인 마렐라, 딸 마르게리타, 외손자이자 후계자인 존 엘칸에게 각각 37, 37, 25%씩 상속된 주식 지분에서 마렐라가 자신의 지분을 존에게 양도했으며 마르게리타는 이를 승인하는 서류에 서명하라고 요구 받았다. 그녀는 고문단에게 모든 재산의 정확한 목록을 요청했으나 답변에 기재된 목록엔 전세계에 망라되어 있는 해외 재산은 배제된 채 이탈리아에 있는 재산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르게리타는 고문들이 마렐라를 조종해 존 엘칸에게 지분 양도를 종용했다고 믿고 있다. 이 조치로 인해 마르게리타의 또 다른 일가는 피아트에서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2004년 3월, 1년 만에 합의가 이루어져서 마르게리타는 20억 불을 상속받고 서명했다. 
평화도 잠시, 얼마 후 익명의 예금주가 그녀의 스위스 은행 계좌로 1억 9백만 유로를 입금하자 그것이 재산이 은폐되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생각한 마르게리타는 다시 한번 분노했다. 그녀는 고문단에게 돈의 출처를 물었으나 답변을 거부당했다. 그녀는 변호사를 고용했고 차남인 라포의 생일에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3일 후 라포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트랜섹슈얼 매춘부들과의 파티 중 약물 과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가족들의 비난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르게리타는 2007년 5월 가베티, 스티븐스, 마론 세 고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의 변호사는 아넬리 일가가 장악하고 있는 이탈리아 언론이 아닌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 그녀의 입장을 공개했다. 가족 내부의 상속문제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에 대해 원로들을 비롯한 아넬리 일가는 경악했다. 이들은 언론 성명을 통해 세 명의 고문에 대한 무한한 지지와 신뢰를 재확인하고 가족 모두가 그녀의 소송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족들은 그녀로부터 모두 등을 돌린 상태다. 그녀는 일체의 가족 모임에서 제외되고 있으며 첫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세 자녀를 포함, 200여명에 달하는 아넬리 일가로부터 배척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르게리타가 공격하고 있는 고문 3인방은 나머지 아넬리 일족 입장에서 볼 때 사실상 피아트를 위기에서 구해낸 은인들이다. 그들은 지아니 사후 피아트에 닥친 위기를 절묘하게 넘기고 상황을 호전시켰다. 그녀는 이처럼 호전된 회사의 상황이 소송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격렬하게 부인한다. 블루 오차드라는 자선단체의 공동 설립자로서 7억불의 기금을 마련, 불우한 여성과 고아를 돕는 자선 사업가이기도 한 마르게리타는 여러 형태로 은닉되어 있는 선친의 정확한 재산 내역이 자신의 자녀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곤혹스런 상황을 감수할 바에야 왜 누군가가 속시원히 그녀에게 정확한 재산내역을 공개하고 빨리 소송을 덮어버리지 않는가? 그것은 아직까지 누구도 지아니 아넬리의 실질적 재산 범위를 안다고 시인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정확한 내역의 공개는 피아트를 곤란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입장이 맞물려 상당한 시일을 끌 것으로 보이는 이 소송이 이탈리아 전역에 최상류층의 소프 오페라를 제공하고 특정 소수에 의해 경제가 독점되어온 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줄 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넬리는 이탈리아의 영구적인 권력기구다  
마르게리타가 첫 남편 알랭 엘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인 존 엘칸과 라포 엘칸은 둘 다 조부와 조부의 친구였던 헨리 키신저에게 깊은 존경을 표한다. 지아니는 존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그의 성을 아넬리로 바꾸려고 하기도 했다. 존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이탈리아 귀족 출신을 아내로 맞았다. 그의 부인 라비니아는 유서 깊은 보로메오 가문 출신이다. 존 엘칸은 현재 피아트 그룹의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페라리 회장 루카 몬테제몰로가 피아트 회장을 겸임하여 섭정하고 있다. 
존이 조용하고 다소 수줍은 반면 ‘라포 오브 럭셔리’라는 별명을 지닌 라포 엘칸은 보다 생기 있고 외향적이며 미디어의 노출을 즐긴다. 조부의 카체라니 양복을 물려 입는 그는 <배니티 페어> 선정 베스트 드레서에 단골로 뽑힐 정도로 과감하고 빼어난 패션 감각을 지닌 유명한 플레이보이다. 2005년의 약물과용 사고를 딛고 일어난 그는 2007년 자신의 회사 ‘이탈리아 인디펜던트’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조부의 대단한 명성을 이어갈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의 이 유명한 코멘트는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가. “아넬리는 이탈리아의 영구적인 권력기구다.”
글/ 김잔듸(프리랜스 작가)




1  재클린 케네디는 1962년 8월의 2주를 지아니 아넬리와 함께 보냈다. 재클린 케네디(가운데)와 그녀의 동생이자 미국 사교계의 명사였던 리 래지윌이 지아니와 함께 요트쪽으로 걷고 있다.
2  1968년 12월 1일. 아네리 가족이 자태인 빌라 보나에 모였다. 지아니 아넬리 옆은부인 마렐라 아넬리. 그 앞은 아들 에두아르도와 딸 마르게리타다.




3  페라리의 새로운 F1 머시 F310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지아니가 미하엘 슈마허를 격려하고 있다.
4  지아니 아넬리의 후계자로 피아트 제국을 이끌어갈 외손자 존 엘칸(오른쪽)과 그의 동생 라포 엘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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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ny Lv.30 / 10,490p
댓글 5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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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재밌긴한데 복잡하네요 ㅜㅜ
그래도 전부터 알고싶었던 관계도라서 좋은 정보 배우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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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정독했네요 좋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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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정말 많은걸 배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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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이런자료조아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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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ㅋ

우리나라든 이탈리아든 재벌계는 참 재미있는 세계네요 ㅋ
VR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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