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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레날린- 조회 수 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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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아피아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라-
(파올로 포르콜린씨의 인터뷰입니다.)
'미운오리 새끼' 란 동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괴롭힘 당하고 자란 미운 오리새끼가 결국은 예쁘게 성장하여,
마지막엔 누구나 부러워하는 백조가 되었다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나도 자주, 잠들기 전에 할머니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기억이 있다.
자, 이번 이야기는 축구계를 무대로 한, '미운오리 새끼' 와 똑같은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스테판 아피아.
그의 지금까지의 축구인생은 언젠가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멋진 석세스 스토리인 것이다.
옛날 옛날, 아프리카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그다지 유복하지 못한 일가가 살고 있었다.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 이 집에 작은 남자아이가 탄생했다.
부모는 그를 스테판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도 가족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테판은 쑥쑥 건강하게 자랐다.
스테판은 축구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가나에는 이탈리아나 일본과 같이 훌륭한 스포츠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너덜너덜해진 공을 길가에서 열심히 찼다.
물론 집에는 TV 등의 사치품이 없었다.
소년은 근처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숨어들어가서 축구 중계를 빠져들 듯이 바라보았다.
덕분에 10살을 넘겼을 때에는 대부분의 유명선수들을 외워버렸다고 한다.
마음에 들었던 선수는 AC밀란의 네덜란드 트리오.
마르코 반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의 세 명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또한 가나 가까이의 축구 강호국 세네갈이나 카메룬 대표팀에도 동경을 품고 있었다.
가나는 가난한 작은 나라라 아프리카 축구 대국과 어깨를 겨룰 레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스테판은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의 꿈은 PV로 보는 것 같은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 입단한 클럽은 하츠 오브 오크.
그는 그곳에서 팀 이름과 같은 '떡갈나무' 와 같이 다부지게 성장했다.
스테판은 테크닉도 있었고 슛 능력도 보통을 넘어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향상심도 있었다.
가나 1부리그 데뷔를 해낸 것은 96년.
그는 불과 16살로 꿈의 세계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가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듯이..
자, 이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클라이막스로 돌입하는데,
계속되는 이야기는 내가 아닌, 아피아 자신의 입으로 들어보자.
-스테판, 당신은 가나에서 프로 데뷔를 하고나서
약 1년 후에 벌써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우선은 그 때의 일을 이야기해주지 않겠습니까?
아: 계기는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되었던 월드유스(97년)이었습니다.
나는 가나 유스의 일원으로 뽑혀,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기회를 얻었어요.
어쨌든 너무 기뻐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그 대회 후에 찾아왔죠.
아: 그렇습니다. 말레이시아에는 전 세계 클럽의 스카우터들이 왔었고,
그 중에는 우디네세의 로 모나코도 있었습니다.
그는 내 플레이를 정말 맘에 들어한 듯 해서 시합 후에
'이탈리아에서 플레이할 생각은 없는가?' 라고 물어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 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시 아직 17살의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이건 인생을 바꿀 최고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YES'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엔 팀 간의 협상도 무리없이 흘러갔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어요.
-정말 '스피드 이적' 이었던 거군요?
아: 네. 너무나 이야기가 척척 진행되었어서,
난 언제 내 소유권이 우디네세로 넘어갔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어쨌든 말레이시아에 있는 사이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나는 가나에 돌아갈 새도 없이 직접 우디네로 향했습니다.
-가나와 이탈리아는 기후도 관습도, 음식도 모든 것이 다릅니다.
당혹스러운 점은 없었습니까?
아: 마치 별세계로 옮겨 온 듯한 기분이었어요.
어머니가 계속 옆에 계셔 준 덕택에 이것 저것 도움을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익숙해 지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아요.
그러나 금방 1군에 들어가지 못하고 프리마베라에서 플레이 했던 일은 옳았습니다.
역시 동세대 쪽이 서로 마음이 통하기에도 간단했으니까요.
-이적 당초에는 이탈리아 요리에 전혀 적응하지 못해서
젤라토만 먹었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아: 잘 알고 있네요, 그런 얘기를(웃음).
부끄럽지만 정말이에요. 이탈리아 요리같은건 거의 몰랐었고,
지금이니까 고백하지만 당시엔 시험삼아 먹어볼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젤라토만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만 먹었었어요.
그러나 그런 식생활로는 안된다라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주의 받았어서 조금씩 새로운 것도 테스트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피자와 파스타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에요(웃음).
-자, 프리마베라에서 조금 플레이 한 후에,
드디어 세리에A 데뷔를 장식할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 날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 물론 기억하고 있어요. 감독님은 알베르토 자케로니.
무대는 산 시로에서의 밀란전이었습니다(98년 2월).
어쨌든 계속 너무 긴장을 하고 있어서 다리가 떨리는 걸 참는데 고생했었어요.
-플레이 내용은 어땠습니까?
아: 아마 좋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감독님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써 주셨으니까요.
다음 시즌에는 아마 21시합에 출장했을 거에요.
이건 절대 적은 수치가 아니잖아요?
-훌륭한 수치입니다. 그리고 플레이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증거로 파르마가 큰 돈을 들여서 당신의 영입에 뛰어들었지 않습니까.
아: 그건 마침 양 클럽간의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이에요.
파르마는 나와 아모로소를 원했고, 우디네세는 피오레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신 자신이 칼쵸메르카토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기뻤죠?
아: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기뻤습니다.
빅클럽에게 주목을 받았단 사실은 내 자존심에 좋은 자극을 주었고,
무엇보다 모국을 뒤로 하고, 먼 이탈리아까지 온 것은
틀린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파르마와의 이야기가 마무리 된 직후에 무서운 병마가 덮쳤습니다.
진단결과는 B형간염이었어요.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아: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어요.
마치 꿈이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파르마는 나와의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나에게 간염 전문가 밑에서 치료를 받을 기회를 주고,
완치되기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었습니다. 투병생활은 1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2000년 여름, 나는 드디어 파르마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어요.
-병이 완치되었다고는 해도, 파르마에서는 좀처럼 출장기회를 얻을 수 없었죠?
아: 확실히 입단 1년 째는 15시합,
그 다음 시즌은 좀 더 적어져 13시합 밖에 출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 원인은?
아: 그런 이유는 확실합니다.
즉, 감독이 나보다도 다른 선수들을 쓰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파르마는 같은 시즌에 몇 차례나 감독이 바뀐,
클럽 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나 자신도 최상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어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브레시아에의 렌탈 설이 나왔을 때도,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겠군요?
아: 그럭저럭요. 확실히 파르마 쪽이 강호클럽일지도 모르지만,
브레시아로의 이적이 '후퇴'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힘을 발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덧붙여 감독은 위대한 마초네였고, 팀메이트 중에는 바조도 있습니다.
이 이상의 환경은 없을거에요.
-실제, 입단해 보니?
아: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 되었습니다.
시즌을 걸쳐 레귤러 포지션을 확보할 수 있었고
7골이란 덤까지 따라왔습니다.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브레시아에 입단하고 가장 변한 점은 무엇입니까?
아: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까요.
우디네에서도 파르마에서도 나는 어딘가에 공포감을 안고 플레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브레시아에서는 레귤러 포지션을 받은 덕택에 마음껏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카를레토(마초네의 애칭)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는 언제나 나를 신경써주고 용기를 주고, 그리고 신뢰해 주었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카를레토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부터 당신은 명문 유베의 일원입니다.
즉, 브레시아는 당신을 큰 무대로 점프시켜준 발판이었던 것이죠?
아: 맞습니다. 이번 이적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고향 가나에 있었어요.
낭보를 전해 준 것은 파르마 시절부터 계속 사이가 좋았던 튀랑이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유베의 모지가 너와 얘기하고 싶어하고 있어.'
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 한마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모지와 이야기를 한 후에, 즉 이적이 결정된 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곧장 브레시아에서 토리노로 이사했어요.
그리고 새로운 팀메이트들과 함께 아오스타 계곡의
샤티온에서 치뤄지는 여름 캠프에 참가했습니다.
-유베의 첫인상은?
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직되어있다고 느꼈습니다.
선수들도 감독도 스텝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어요.
그걸 보고 나는 세계 제일의 팀에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유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유베가 나를 필요로 해주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요.
-새로운 팀메이트들과는 처음에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아: 아직도 젤라토랑 빵만 먹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파스타와 피자만으로 살고있다고 대답했어요(웃음).
-유베행은 멋진 비약이었지만,
이후에는 치열한 포지션 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산은 있을까요?
아: 유베의 선수들은 전원이 모두 위대한 캄피오네입니다.
그들과 같은 레벨로 보여지려면 좀 더 성장하지 않으면 안돼요.
하지만 나는 반드시 그걸 달성해 보일겁니다.
리피 감독이 원하는 일들에 전력으로 부응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브레시아에서는 바조를 위해 달려왔습니다만,
이제는 델 피에로를 위해 달리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아: 달리는 건 싫어하지 않으니까 누구를 위해서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델피에로는 스스로도 많이 움직이고 돌아다니니까 브레시아 시절과는 상황이 달라요.
-만약 출장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긴, 유베에서는 델피에로조차 벤치를 덥히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도리가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아: 벤치로 만족할 수 있는 선수 따윈 없습니다.
출장기회가 주어지느냐 마느냐는 자기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습니다.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에요.
-마지막으로 사생활 이야기도 조금 해주지 않겠습니까? 가족 구성원은?
아: 4인 가족입니다.
부인 하나에 아이들은 막 4살이 된 라리와 10월에 2살이 되는 로드니.
오프때는 가능한한 가족들과 함께 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토리노 거리에는 이제 익숙해졌나요?
아: 네네, 정말 맘에 들어요.
크로체타라는 한적한 주택가의 집을 찾았습니다.
근처에는 튀랑과 다비즈도 살아요.
-차는?
아: 포르셰를 한 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판은 꽤 농담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브레시아 시절에는 자주 팀메이트인 타레를 놀리고 놀았어요.
예를 들어 '넌 알바니아사람이니까 이탈리아엔 고무보트로 건너왔지?' 라고 말하면서요.
하지만 어느날 그 타레가 나에게 복수를 해 왔습니다.
녀석은 정말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욕해서 명예를 훼손한 일로 알바니아의 마피아들이 분노하고 있으니까,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라고 말했어요.
너무나 심각한 표정이었어서 난 완전히 믿어버렸거든요...
하지만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녀석의 연기에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습니다(웃음).
-패션에도 관심이 있는 듯 합니다만 좋아하는 옷 브랜드는?
아: 돌체앤가바나. 하지만 가지고 있는 건 티셔츠뿐이지만요.
옷깃이 있는 셔츠를 입는 건 교회에 갈 때 정도일까요?
물론 처음 유베 프론트들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는
내 자랑인 단 한벌의 외출복으로 단번에 결정했지만요.
월드사커다이제스트 9월18일 헤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