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 20-21 써드아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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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6일 17시 36분

 

발단 :

 

안첼로티가 맡고 있던 유벤투스는 각각 99/00시즌엔 라치오에게, 00/01시즌엔 로마에게 막판에 역전당하면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치게 됩니다. 심지어 유벤투스 구단 측은 00/01 시즌 마지막 라운드 아탈란타전 하프타임에 안첼로티 경질을 발표합니다. 아직 우승의 일말 희망도 남아있었는데요. 어쨌든 리피가 돌아왔고 지단을 매각한뒤 튀랑, 부폰, 네드베드란 걸출한 선수들을 수급합니다.

 

당시 인테르를 지휘하고 있던 엑토르 쿠페르는 그 시즌 세리에 A에서 유일한 외국인 감독이었습니다. 새로 데려온 마테라찌와 톨도가 팀에 필요했던 리더쉽을 보여줬고 후반기엔 무릎 부상으로 14개월동안 7분 출장에 그쳤던 호나우도도 복귀했습니다. 

 

전개 :

 

인테르의 3월은 가히 어마어마했습니다. 밀라노 더비를 이겼습니다. 로마도 꺾었네요. 피오렌티나도 제압했으니 이제 하던대로만 하면 꿈에 그리던 우승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4월에는 추격의 기회를 내주고 맙니다. 안방에서 아탈란타에게 충격패를 당한데다가, 키에보 원정에선 종료 직전 동점골을 허용하며 귀중한 승점을 놓칩니다. 여담으로 이 때의 키에보는 선전하여 구단 사상 첫 유럽대항전 진출까지 일궈냈다고 하네요.

 

한편 유벤투스에는 시즌 내내 프리롤을 부여받아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던 네드베드가 있었습니다. 피아첸자전에 나선 이 금발의 사자는 88분에 천금같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팀에 1-0 승리를 안깁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냐면, 6점까지 벌어졌던 인테르와의 승점차가 두 라운드만에 1점으로 줄어들었다는 소리랍니다. 

 

사족으로 로마 또한 대권에 도전하는 중이었는데요, 하지만 파비오 카펠로 사단은 AC 밀란과 득점없이 비긴데 이어 이미 강등이 확정된 베네치아와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추격 타이밍을 놓칩니다.

 

37라운드가 종료되었고 1위 인테르 69점, 2위 유벤투스 68점, 3위 로마 67점.대망의 마지막 라운드가 열리는 2002년 5월 5일의 오후가 다가왔습니다. 

 

위기 :

 

하늘은 이들에게 핑계삼을 변명도 주지 않을 작정이었는지, 세 팀의 운명은 모두 원정 경기로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라치오 대 인테르, 우디네세 대 유벤투스, 토리노 대 로마의 매치업입니다. 축구팬들이라면 굳이 복잡하게 설명 안해드려도 되겠죠? 인테르는 이기면 자력 확정, 유베는 일단 이기고 인테르가 져야, 로마는 이기고 인테르/유베 모두 져야 우승을 손에 쥐는 상황이었습니다.

 

상대팀의 면면을 봐보자면 우디네세는 당시 강등방어 생존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토리노는 최종성적 11위로 평범한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반면 라치오는 6위로 시즌을 마쳤으니 경기 이기기는 인테르가 제일 힘들었지만, 우승하기는 인테르가 제일 쉬웠다고 할 수 있겠네요.

 

모든 시선은 스타디오 올림피코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 곳은 딱 1년 전, 로마가 근 20년만에 스쿠데토 쟁취에 성공하며 광란의 관중 난입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인테르도 올 해 같은 장면이 자기에게 재현되길 꿈꾸고 있죠. 아주 보기 드문 그림인데, 홈 팀 라치오의 팬들이 인테르를 응원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베의 우승을 원치 않아서? 아니죠. 당장 내 팀이 리그 마지막 경기 지는 것보다 연고지 라이벌 로마가 혹시나 역전 우승을 해내는 꼴을 보는 것이 속이 쓰리다 이겁니다. 여러분 축구가 이렇게 심오합니다.

 

여하튼 가장 쉬운 상대와 경기하던 유베가 일찌감치 앞서갑니다. 알레제게 영혼의 듀오가 2분, 11분에 골을 만들어냈거든요. 예상치 못한 상황도 아니지만, 이 소식은 여지없이 스타디오 올림피코에 전해집니다.

 

절정 :

 

https://youtu.be/_5dM1ohC5XI

 

경기 전이나 경기 중이나 인테르 팬들의 마음가짐은 한결같았을 겁니다. '나만 잘하면 돼.' 그래도 유벤투스가 낙승하는 분위기라는 얘기가 들려오면 똥줄이 탈 수 밖에 없는 게 사람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인테르가 코너에 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 12분, 8년을 유베에서 보냈던 라치오의 골키퍼 페루찌가 크로스를 잡으려다 공을 놓치고, 이것을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차 넣으며 인테르가 앞서갑니다. 그렇습니다. 저 동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리는 이 경기만 이기면 됩니다. 상대팀 서포터마저 우리를 응원하고 있잖아요?

 

기쁨도 잠시 8분만에 라치오의 동점골이 터지며 위장으로 들어간 김칫국을 역류시킵니다. 포보르스키가 박스 안에서 컷백 헤더를 받아 강려크한 슛으로 마무리합니다.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유벤투스는 강등권 팀을 상대로 이기고 있으니 우승컵 한 쪽 귀퉁이에 흑백 리본이 메어지는 게 인테르 팬들의 머릿 속에 아른아른 떠오릅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 경기는 많이 남아있다지만 끝내 이긴대도 이런 애태우는 경기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스포일러: 끝내 이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테르는 다시 앞서갑니다. 코너킥 상황에서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레코바가 정확한 택배를 배송했고 디비아지오가 헤더로 짤라넣었습니다. 웃통을 까고 세레머니를 하는 그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보이네요. 이 경기와 득점은 디비아지오가 인테르에서 남긴 마지막 족적이 되었습니다.

 

전반이 왜 이리도 긴건지, 전반 종료 직전 라치오의 크로스를 이반 코르도바가 헤더로 막습니다. 공은 수직에 가깝게 높이 떠올랐고 인테르의 풀백 그레스코는 안정적인 헤더 백패스로 키퍼에게 공을 넘기려고 했습니다. 45분이니 이 공을 톨도가 잡고 적당히 어디로 뿌리면 심판이 삑 휘슬을 불겠지. 전반을 이긴 채로 마무리할 수 있겠지. 그런데 공이 워낙 높아서였을까요, 어찌 의도한 것보다 헤더가 충분히 강하지 않네요. 아 조금 약하니까 톨도가 뛰어나와 잡으라해야겠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눈 앞에 아까 그 놈 또보르스키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쇄도하여 골망을 뒤흔드는데 성공했습니다. 톨도가 그레스코를 죽일듯이 쳐다보며 항의하네요. 이것이 그레스코의 인테르 공식전 마지막 출전이었습니다. 또르르.

 

이렇게 라치오와 인테르의 경기 전반전은 2-2로 끝납니다. 유베는 어땠냐구요?  지고 있던 우디네세 입장에선 강등권 생존 다툼을 벌이고 있던 베로나가 3-0으로 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 쪽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이 경기가 이대로 끝나더라도 잔류는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해보되 절박하진 않죠. 3-0의 격차가 좁혀지는 건 언젠가 터키에서 열리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정도 되야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하하하.. 그래서 이 경기 관중들의 시선은 사실 올림피코에 더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로마는 좀처럼 토리노의 골문을 열지 못하다가 68분이 되서야 카싸노가 득점에 성공합니다. 이미 12분부터 유베는 이기고 있었으니 큰 소망은 가지지 못했겠지만, 최소한 할 수 있는 데까진 했다는 떳떳함은 지켜내네요.

 

결말 :

 

https://youtu.be/pmr_r8ImB_g

 

인테르의 실시간 결과를 전해듣는 유베경기 현지 반응

 

시간이 흐르수록 인테르 벤치를 지키던 쿠페르는 초조함에 줄담배를 피워댔습니다. 당시엔 경기장 내에서 흡연을 해도 됐답니다. 이윽고 후반전 11분 디에고 시메오네가 자신의 미래의 소속팀에 비수를 꽃습니다. 이 골로 라치오가 3-2로 역전을 해버렸습니다. 그는 이후 선수생활을 마치고 파랑검정의 정반대인 하양빨강의 줄무늬가 트레이트 마크인 스페인 수도팀의 두목이 됩니다.

 

그리고 눈에 띄게 다급해진 인테르가 허둥지둥하던 73분, 형내림을 받았는지 시모네 인자기가 노마크 포지션을 찾아들어가 크로스를 받아 헤더로 넣으며 스코어를 4-2로 만듭니다. 78분, 교체로 나오던 호나우두의 눈에는 서러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같은 시간 홈팬들에게 박수를 유도하며 유유자적 교체로 걸어나오는 시메오네의 등짝엔 톨도가 재촉의 등짝스매쉬를 남겼습니다.

 

이변은 이렇게 끝납니다. 로마와 유벤투스는 이겼고 각자 3위에서 2위, 2위에서 1위로 점프했습니다. 13년만에 우승을 꿈꿨던 37라운드 선두 1위 인테르는 90분 만에 3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이 때 세리에는 1,2위가 챔스 조별예선 진출, 3,4위가 챔스 3차예선에 진출했으니 우승을 놓친 충격은 자존심 뿐 아니라 다음 시즌에도 타격을 입혔습니다.

 

양 팀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인테르가 꿈에 그렸던 우승의 관중난입은 우디네세의 프리울리 경기장에서 벌어졌고, 유벤투스 선수들은 빤쓰 빼고 다 뺏기면서도 좋아죽었습니다. 올림피코에서도 난입은 일어나긴 했습니다. 응원하는 팀의 모습에 감동받은 라치오 팬들이 필드로 들어왔거든요. 

 

콘테와 마테라치는 가시돋힌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역전 우승이 확정된 후 라커룸에서 축하를 즐기던 콘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https://youtu.be/B5plmmTt55I

 

"뭐라고 말해야될지 모르겠다.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 이것은 2년 전 페루지아에서의 실망을 위한 것이다. 아마 그 때 페루지아에 있던 누군가가 보고 있을 것이다."

 

이건 무슨 맥락인가하면, 앞서 말했듯이 유벤투스는 라치오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한 00/01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페루지아에게 패배했는데요, 당시 페루지아 소속의 마테라찌에게 콘테는 '존중이 결여된 행동을 한다'는 비난을 남겼습니다. 두 선수 사이의 반감은 위 발언에 대한 마테라치의 응수에서도 아주 잘 드러났습니다. 경기 후 우승이 좌절되서 아무말도 하기 싫을 마테라찌를 짓궂은 이탈리아 언론사가 찾아가 콘테가 한 얘기를 전해줘봤습니다.

 

https://youtu.be/L1J4-hox7Wo

 

 "콘테는 우승 상금으로 새 가발이나 맞춰야할 것이다."

 

탈모인을 향한 이런 인신공격성 발언에도 우리의 콘테는 의연하게 대처하며 상대의 뼈만을 골라때렸습니다.

 

"요새는 가발이 아니라 모발 이식을 한다. 하지만 그에겐 안타깝게도, 두뇌 이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머머리 드립을 머가리 드립으로 멋지게 받아낸 콘테. 훗날 그는 진짜로 머리를 심고 감독으로 친정팀에 돌아와 부진으로 신음하던 몰락명가를 단숨에 재건해내는 공로를 세웁니다.

 

한 달 후, 유럽도 남미도 아닌 곳에서 처음 열린 2002 월드컵.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호나우두는 브라질의 우승을 쌉캐리하며 다시 멋지게 떠올랐고,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리그와 화려한 스쿼드를 자랑하던 이탈리아 대표팀은 관중석이 시뻘겋게 물든 어느 스타디움에서 왠 동방의 예의지국을 만나 토너먼트 첫 단계에서 탈락합니다. 펄-럭.

 

이처럼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 스포츠의 매력이라지만, 유베 팬으로서 승리는 가능한 오래 높게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시즌은 그게 챔스이길 바라고 있구요. 시청각 자료를 찾아보며 직접 써본 글인데 현장감이 조금 느껴졌으면,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칼럼 : 

 

https://thesefootballtimes.co/2018/05/04/the-great-serie-a-title-race-of-2001-02/

Profile
title: 20-21 써드아케 Lv.52 / 87,162p

Win the 57th match.
제 글은 당사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추천 자제좀ㅠ 알림이 너무 많이와요..

댓글 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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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아주 재밌게 읽고 갑니다. 마지막 경기로 뒤집은 통쾌한 우승, 그리고 그것보다 더 통쾌한 머가리 드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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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ㅋㅋㅋㅋㅋㅋㅋ 머머리 머가리 드립 마무리가 완벽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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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아아 요런거 넘모 좋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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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머머리 머가리 ㅋㅋㅋ 탈모인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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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꿀잼이었습니다 ㅋㅋ 정말 당시에 봤었더라면 짜릿짜릿했겠네요
져이때 호나우두 닭똥같은 눈물 라이브로 봤었어요...
정말 .. 그후에 월드컵 완전부활 너무 멋졌다는
이때의 호나우두는 저에게 축구의 모든것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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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9

와 콘테감독님 현역시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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