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 18-19 터틀넥 점퍼아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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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9일 13시 42분

대부분의 축구 팬들은 '절대 우승하지 못함'이 어떤 뜻인지를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팬들이 수 십년에 걸쳐 익숙해지게 된 현실이다. 속쓰린 대다수의 팬들에게 우승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소망이요 팬덤의 영원한 야속함의 본질이다. 그런데 유벤투스 팬들은 다르다. 비안코네리는 너무나 압도적이고 트로피룸은 거대하다. 커가면서 유벤투스가 다양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 팬은 정말로 희귀하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를 종합해 둘러볼 때, 유벤투스는 분명한 주도 세력이었다. 그들은 5연속 스쿠데토를 기록한 처음이자 마지막 팀이다. 지금까지 어떤 팀보다도 많은 우승-34회-을 이뤘다. 유벤투스의 꾸준한 자국 내 위엄은 칼치오의 전통적인 빅 3를 유베와 양 밀란이라는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다양한 인종, 계층, 이탈리아 내외에 유베 팬들이 존재하지만, 그 밖의 세계인 비 유베 팬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 팀은 전혀 다른 팀이다. 아웃사이더들에게 유벤투스는 차가운 기계같고 억제할 수 없으며 획일적으로 성공한 클럽, 요새 사라져가기에 팬들이 더욱 소망하는 축구계의 로맨스가 전혀 없는 팀이다. 유벤투스는 기대하고 요구하며 궁극적으로, 효율적이다.

 

하지만 패배라는 글자가 이 토리노의 거인에게 항상 낯설은 단어였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1980년대 중반과 1990년대 중반까지 근 10년간 이 클럽은 단 하나의 타이틀도 확보하지 못했다. 8년간 우승이 없었으며, 이들의 지배력은 약화되었고, 혁명가 아리고 사키와 주의 깊은 파비오 카펠로가 이끄는 밀란이 정상의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져니(미국의 락밴드)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지는 법을 배우면, 이기는 데 필요한 걸 알게 될거야.(When you learn to lose, you'll know what it takes to win.")

 

가식적이라고? 당연하다. 하지만 1980년대와90 년대를 겪은 유베팬들에겐 이런 감성이 가슴을 때릴 것이다. 이 식에 유베의 세계적 위상은 잠시 추락했었다. 그들은 20년간의 수그러들지 않는 성공 후 비로소 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1940년대 이후 가장 긴 실패의 시기를 보내는 클럽의 모습을 보며 팬들은 드디어 이 아름다운 게임의 암울한 현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영원할 수 없었고, 실제로 그랬다.

 

마르첼로 리피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스포츠 심볼의 몰락을 목격했고, 1994년 비토리오 키우사노 당시 유벤투스 회장의 간절한 부름에 답했다. 키우사노는 토리노 태생으로서 처음엔 보드진, 그 후엔 부회장으로 클럽 내에 입지가 상당한 인물이었다. 귀족 계급의 변호사는 결국 1990년 2월 클럽의 회장이 되었고 그가 사랑하는 상처입은 베키아 시뇨라의 위상을 재건하는 일을 시도할 참이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명성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첫 유베 부임기간 10 시즌동안 6번의 우승을 가져왔던 감독 지오반니 트라파토니를 복귀시켰고, 이어서 이례적인 표면상의 팀을 구성했다. 그는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하며 이탈리아의 아이콘 로베르토 바지오를 데려왔고, 지안루카 비알리와 잉글랜드 대표인 다비드 플랫과 독일의 스타 위르겐 콜러, 안드레아스 뮐러를 영입했다. 덜 유명한 선수라해도 이 때 안젤로 페루찌, 마시모 카레라, 안젤로 디 리비오, 안토니오 콘테와 파브리지오 라바넬리가 스쿼드의 질적인 우수함에 더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스쿠데토는 손아귀를 빗겨나갔다.

 

세 시즌이 흘러가자 압박감은 고조되었고 트라파토니는 클럽을 떠났다. 리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성공만이 유일한 선택지였고 그렇게 유벤투스의 부활이 시작되었다.

 

승리의 문화

 

리피는 이탈리아 축구의 새 심미안을 가져왔다. 필드 위가 아닌 필드 밖에서. 가혹한 인상파인 밀란의 카펠로와는 대조적으로, 유베의 새 감독은 강직하게 잘 생긴 사람이었다. 샤프한 드레스 센스에 시가를 좋아하는 은발의 리피는 멋짐의 표상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경조차 그의 모습에 홀릴 정도였다. 열화의 스코틀랜드인은 그의 자서전 <나의 축구 나의 인생Managing My Life>에서 "그의 눈을 바라보기만해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가끔은 진지함으로 불타거나, 반짝이고 있거나, 때로는 조심스레 당신을 가늠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지성으로 살아있는 것이 그의 눈이다"라고 말했다.

 

존경받는 동료들의 흥분을 진정시키는 능력 외에도, 리피는 열정적인 축구 인사였다. 그의 너그러운 인상과 출생지인 비아레조의 해변에서 뛰놀았던 전원적인 성장기 경험, 평범한 선수 시절 커리어와 초기 감독계에서 생존 미션에서 성공했다는 점은 이 뻔뻔하고 무자비한 감독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력서와는 달리 그의 정신력은 승리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유벤투스에 완벽한 적임자였다.

 

자신의 훈육에 전념하며, 리피는 선수 생활이 끝날 무렵부터 감독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그는 곧바로 삼프도리아의 유스팀을 맡았고 이어 이탈리아 하부 리그로 진출했으며, 자기계발에 전념했다. 코베르치아노를 졸업한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보통의 흔한 감독 그 이상이 아니었지만, 분명한 무시 기조가 있었던 이적시장에 대해 90년대엔 그 중요성이 점차 인식되고 있었다. 만약 그의 고용주가 선수를 사다주면, 리피는 그 선수의 자질과 지속성을 막론하고 선수를 성장시키는 책임을 졌다. 하지만 그가 팀을 건설하느라 끊임없이 일할 때도,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말참견을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리피는 자신의 선수들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압도적으로 다수에게는 이것은 일도 아니지만, 어떤 선수들에겐 감독의 친화력은 문젯거리였다. 그리고 리피와 선수의 관계가 파탄나면 그 관계가 항상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팀에 맞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도 맞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 하에 리피가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를 쳐낸 것도 여러 번이다. 비알리의 책 <이탈리안 잡Italian Job>에 의하면 후에 리피는 비알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축구에선 선수와 열린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난 선수들과 자주 대화하며 그것이 문화, 전술, 기술, 사회 등 다방면에서 나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말을 하고 싶다. 대화는 감독을 성장시켜준다."

 

로베르토 바지오는 리피의 인간관리 형식에 그리 잘 맞지 않았다. 부상은 이 둘의 첫 시즌을 마지막으로 만들었다. 리피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를 데려오는 기회를 잡았으며 바지오는 1995년 밀란으로 이적했다. 이 둘은 훗날 대표팀에서 재회하지만, 바지오는 리피의 친밀한 요구에 당황했었다고 회고한다. 바지오는 본인의 자서전 <하늘에서의 골A Goal In The Sky>에서 "사실상, 리피는 내게 스파이가 되기를 원했다. 난 내 커리어 내내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에게 매우 분명히 말했다. '감독님, 제가 어떻게든 당신을 돕겠지만, 내게 이름을 읊으라고 요구하지는 마세요.' 리피는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크리스티안 비에리 또한 리피가 팀을 이끌 때의 솔직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경험이 있는 선수다. 하지만 바지오와는 달리 그는 그것을 극복해내고 성공했다. 크고 강한 외곬수의 치명적인 피니셔였지만, 비에리는 비판에 매우 민감한 선수였다. 96/97시즌 아탈란타전 전반을 0-0으로 마치고 라커룸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자, 그는 분노하여 감독을 때리려고 했고 결국 팀 동료들이 떼어놓았다.

 

비에리는 수 주간 벤치에 남겨진 후에 전력으로 복귀했다. 한 시즌만에 매각되며 그의 흑과 백은 끝났지만 이것은 리피와의 관계와는 무관했던 일이었다. 이 둘은 충돌 이후엔 의견의 일치를 보였고 후년엔 친구가 되었다. 오히려 비에리는 그의 이적을 통한 재정적인 이점이 그를 보유할 때의 이점을 상회한다는 시각 때문에 이적을 허가받았다.

 

이것은 1990년대에 유행했던 유벤투스의 주요 전략이었다. 놀랍도록 고행적인 전략이었다. 선수들은 축구선수인 이상 자산이었고, 그들의 가치가 정상을 찍거나 하락하기 시작할 때는 매각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2년간 정확한 패스를 보여줬던 파울로 소사는 1996년 도르트문트로 이적함으로써 이 모델을 개인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후에 그가 유벤투스를 떠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그들이 나의 퀄리티를 더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릎에 문제가 있었고 유베는 내가 더이상 같은 레벨을 달성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어떤 감독은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선 재능은 박탈되고 감독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정장입은 남자가 대신한다. 다행히 가장 순수한 감독이었던 리피는 이런 정책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훈련, 창안, 육성과 논의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역대 가장 영예롭게 효율적인 축구팀 중 하나를 탄생시켰다.

 

승리의 과학

 

리피가 지도자 일을 시작할 시기 칼치오는 진정한 변혁을 겪기 시작했다. 어쩌면 1960,70년대 테르나나의 고라도 비치아니와 라치오의 톰마소 마에스트렐리가 더치스타일 토탈 풋볼을 도입하려는 시도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탈리아 축구는 한 명의 판타지스타 기용이 다른 모든 선수의 창의성을 희생시킨다는 오명을 받고 있던 카테나치오에서 젖을 떼어가기 시작했다.

 

조날 마킹이 유행을 타고, 1980,90년대 이탈리아의 경기장에선 점점더 체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전까지 공격과 수비는 별개였지만, 이제는 팀 전체가 상황마다 책임을 분담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이 기본 원칙이 리피의 철학에 뿌리를 내렸다.

 

리피는 포메이션에 있어서 유연했다. 팀의 하모니, 정신력, 전술력이 더 우선시되었다. 그의 책 <생각의 게임Game of Ideas: Thoughts and Passions from the Sidelines>에서 리피는 팀 스피릿과 협동에 집중했다. 그가 화합을 강조했음은 그의 지도자 경력이 뒷받침한다. 특히 유벤투스에서 그것이 빛나긴 했지만.

 

플레이의 원칙이 우선이었지만, 리피는 그가 기용할 수 있는 선수에게 시스템이 맞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래서 그가 스타디오 델레 알피에 와서 델 피에로, 바지오, 라바넬리, 비알리라는 고스펙의 포워드 4명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진 막대한 공격진의 퀄리티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포메이션을 도입했다.

 

유벤투스에서의 첫 두 시즌동안, 리피는 처음엔 4-3-3을 사용했다. 전방은 비알리, 라바넬리와 바지오 혹은 델피에로 중 한 명으로 구성됐다. 세 명의 아웃-아웃 공격수를 선발로 세우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선수들은 자신을 기용한 것에 대해 중요한 전술적인 값어치를 해줬다.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열심히 해야했다(3톱 중 한 명이 되면, 미드필더를 돕기 위해 훨씬 더 많이 뛰어야했다)"고 비알리는 회고했다.

 

전방의 세 명은 잇따라 상대의 수비라인을 압박하며 유벤투스의 수비 면에서도 상당히 관여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더할나위없이 혹력넘치는 미드필더 트라이던트가 지원하고 있었고, 이들은 보통 소사, 열렬한 콘테와 지능적인 데샹으로 구성되었다. 영리하게 사람을 관리하는 전술적인 책사였던 리피는 기능과 파괴력을 가진 재주를 결합시킬 수 있었다.

 

이 유벤투스라는 기계는 멈출 줄 몰랐다. 차질은 이들에게 충격요법이 될 뿐이었다. 1994/95시즌 세리에A 6라운드에서 포지아에게 당한 2-0 패배는 그 뒤 6연승의 보약이 되어 유베의 타이틀 레이스를 유지시켰다. 비극조차 그들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다.

 

1994년 5월, 트라파토니가 눈여겨보아 클럽에 합류한 23세의 재능있는 레프트백이었던 안드레아 포르투나토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그는 회복하여 퍼스트팀에 복귀했지만, 결국 1995년 4월 25일 너무나 어린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4일 후에 피오렌티나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증오에 찬 라이벌인 양팀의 팬들, 선수들은 킥오프 전 함께 포르투나토에게 애도를 표했다. 리피의 팀은 4-1로 승리했고 8년만에 첫 스쿠데토를 획득하게된다. 이 우승은 포르투나토에게 바쳐졌다.

 

리피 2년차의 유벤투스는 리그 타이틀을 지켜내는데 실패했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와 도르트문트를 꺾고 올라온 루이스 반 할의 아약스를 승부차기에서 꺾으며 우승했다. 쓰리톱 구성은 96/97시즌 버려졌지만, 리피의 유연함이 다시 한번 빛나게 된다. 유벤투스는 96년 여름 프랑스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의 열띤 영입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축구계 가장 소중한 예술가를 위해서 전술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4-3-3을 지나 4-3-1-2를 도입해 지네딘 지단이 스트라이커 듀오 뒤에서 활동하는 식이었다. 전방은 델 피에로와 비에리, 알렌 복시치, 미켈레 파도바노 중 한 명으로 구성되었다.

 

표면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피의 테마는 동일했다. 그는 모든 선수가 모든 상황에 관여하길 원했다. 이것은 공격수가 공격만 할 수 없는 진정한 팀의 화합을 의미했다. 그리고 균형을 추구함에 있어선 그는 수비수 보강에 도움을 받았다. 투지좋은 우루과이인 파올로 몬테로, 전폭적인 마르크 율리아노와 다재다능한 지안루카 페소토가 합류하여 나폴리에서 리피를 따라온 치로 페라라와 함께했다.

 

1997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유벤투스는 지네딘 지단이 수비수들의 물량공세에 막히며 도르트문트에게 3-1로 패배했지만, 그 외에 가능한 트로피는 거의 모두 손에 넣었다. 또다른 리그였던 유러피안 수퍼컵과 인터컨티넨탈 컵이 그에 포함된다.

 

놀라운 성공 가도를 열었음에도 리피는 더욱 계산적이었다. 고급 수비수들이 풍부함을 인지한 그는 4백에서 눈을 돌려 97/98시즌 다이나믹한 3-4-1-2를 시험했다. 이 변주는 몬테로, 페라라, 율리아노로 쓰리백을 쓸 수 있게 했으며 모레노 토리첼리, 디 리비오, 페소토 등을 윙백으로 세울 수 있었다. 지단 앞의 투 톱 중 한 자리는 이제 필리포 인자기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결정은 과감한 것이었지만 그 보답을 했다. 유벤투스는 3연속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라 레알 마드리드에게 1-0으로 졌고, 값비싼 선수들로 꾸린 인테르를 제치고 2년 연속으로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다.

 

승리의 유산

 

지속적 성장의 감독이었던 리피는 트로피로 그의 집중을 갈고닦는데 대신 때이른 향수를 느낄 시간을 가졌다. 1996년 리베르 플라테를 꺾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이후, 그는 현실을 위해 눈물에 찬 눈을 억누르고 있었다. "내가 벤치로 돌아간 때가 기억난다. 코치 페쪼티와 다른 스탭들에게 이제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고 말했었다. 나는 셀레브레이션을 크게 좋아하진 않는다. 난 경기를 하고 난 뒤의 밤보다 하기 전날 밤을 더 좋아한다."

 

이것은 1990년대 유벤투스에서 리피의 어프로치를 정리해준다. 성적은 크게 위로가 되지 않았으며 더 큰 발전을 위한 영향을 주기 위해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승리에 취한 클럽은 우승을 하는 방법을 알면서도 그 결심을 놓지 않는 감독을 선임했다. 전술가, 동기부여사이자 축구선수를 관리할 줄 아는 리피는 이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유벤투스의 성공에 먹구름이 끼어들고 있었다.

 

94년에 비안코네리에 온 디렉터 루치아노 모지가 일으킨 칼치오폴리 스캔들은 그 빛에 검은 거미줄을 드리웠다. 하지만 존 풋이 <칼치오: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Calcio: A History of Italian Football>에서 강하게 주장한 바에 의하면, "모지 시스템은 만능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자국 리그에서 리피의 성적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겐, 앞서 언급한 시스템에 다른 클럽들 또한 관여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참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1998년 즈데넥 제만가 유벤투스와 다른 팀들이 도핑을 하고 있음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2004년 11월 클럽 닥터 리카르도 아그리콜라가 22개월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제만의 코멘트는 유벤투스에 특정한 문제보다는 이탈리아 축구 전반에 걸친 폭넓은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의심은 피해망상적인 이탈리아 축구 세계 내에서 승리했음에 대한 짐이다. 그리고 리피의 유벤투스는 그 짐작으로부터 절대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3년 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른 것 외에도, 리피가 얼마나 대단한 성적을 내고 있었는지는 1999년 그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이후에 인식할 수 있었다. 유벤투스는 98/99시즌에 굉장히 실망스러운 7위를 기록했고 2002년 리피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온 후에도 리피는 트로피를 드는 시간을 즐겼지만, 단연 리피 1기가 최고였다. 그가 빠르게 저물던 팀을 이탈리아 최강 뿐 아니라 세계 최고 중 한 팀으로 재건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그는 우승을 잊고 뿌리가 흔들리던팀을 맡아 성장시켜 스포트라이트에 되돌려놓았다. 그는 한 무리의 선수들을 팀으로 꾸려냈다. 그는 팀을 맞아 스펙터클한 우승 기계로 만들었다. 그는 그들을 다시 유벤투스로 만들었다.

 

https://thesefootballtimes.co/2018/10/18/how-marcello-lippi-masterminded-the-resurgence-of-juventus-in-the-19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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