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 20-21 써드아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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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5일 19시 55분

데르비 델라 몰레는 이탈리아 최대의 더비는 아닐 수 있지만, 유벤투스와 토리노 사이의 라이벌리엔 깊고 특별한 역사가 존재한다. Gaby McK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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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이탈리아 팀이 비극을 맞이한 곳은 한 눈에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래된 단일노선열차를 타고 토리노를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언덕 중 한 곳에 올라가면, 놀라운 도시 전망을 보여주는 작은 까페에 도착하게 된다. 참 멋질 광경이다. 종종 그렇듯 차가운 안개에만 가려지지 않는다면.

작은 길이 방문자들을 언덕 정상에 있는 수페르가 성당으로 이끈다. 수 마일 밖에서도 보이는 훌륭한 건축물이자, 많은 이탈리아 전대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거의 숨겨져다싶이한 뒤 편, 표지판으로 가까스로 존재감을 표시하는 지역에 '1949년 5월 그란데 토리노' 팀이 죽음을 맞이한 곳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추모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으며, 수페르가를 방문한 수많은 토리노 팬들이 바친 토리노 깃발, 꽃과 스카프로 둘러싸여있다. 매년 5월 4일엔 그라나타 팬들이 추모식을 열며 그들의 역사상 최고의 팀에 경의를 표한다.

보통의 축구 팬들이 토리노를 토리노 시의 알프스의 에스파뇰처럼 '두 번째 팀'으로 생각하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그들이 써온 역사는 유벤투스에게 시끄러운 이웃보단 마땅한 적수에 가깝다.

데르비 델라 몰레의 기원은 토리노의 창단 시점으로 돌아간다. 1906년 스위스인 자본가 알프레드 딕이 반대 세력을 끌고 비안코네리에서 갈라져나와 자신의 팀을 만들었다. 풋볼 클럽 토리노는 그 해 12월 16일에 첫 경기를 치뤘으며, 프로 베첼리를 상대로 3-1로 이겼다.

그 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새로 창설된 팀은 처음으로 유벤투스에 도전하게 된다. 이것이 그들 간의 첫 경쟁전이었다. 토리노는 이 경기마저 이겼지만, 창단자 알프레드 딕이 탈퇴하는 아픔을 남겼다. 근거가 미약한 한 가설은 그가 벨로드로모 움베르토 1세의 드레싱 룸에 감금되어서 관중 소리만으로 점수를 파악해야했다고 전한다.

2월 토리노는 사상 최고의 대승을 거둔다. 유벤투스를 4-1로 꺾고 이탈리아 리그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그 후로 111년 동안 데르비 델라 몰레가 없던 시즌은 13년 뿐이었다.

많은 데르비가 널은 사회적 역학 구조의 성격을 띄며, 토리노 더비에 있어서도 특정한 연장선을 이야기할 수 있다. 1923년 아넬리 가의 유벤투스 인수는 올드 레이디에게 좀 더 부르주아적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고, 피아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상당수는 그라나타를 응원했다. 하지만 남부해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보통 유베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로 인해 토리노 시에서는 토리노가 더 인기있고, 이탈리아 나머지 도시에선 유벤투스를 좋아한다는 잘못된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아넬리 가가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정의에 매우 부합하긴 하지만, 토리노 더비는 밀라노 더비와는 달리 한 쪽이 노동자 계급, 다른 쪽이 지배자 계급을 의미하진 않는다. 유명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팔미로 톨리아티는 열성적인 유벤투스 팬이었다. 러시아에 본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는 그는 동지 피에트로 세키아가 이 아름다운 경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꾸짖은 일화로 유명하다. "어떻게 유벤투스의 결과를 모르고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는가!"라면서.

토리노는 1920년 후반 두 개의 스쿠데토를 땄지만 하나는 박탈되었다. 아넬리 가의 자금력이 빠르게 유벤투스를 토리노의 리딩 클럽으로 성장시켰다. 비안코네리는 1930년대 5개의 스쿠데토를 추가했고 1928년부터 1936년까지 더비에서 15경기 무패를 기록하였다. 1938년엔 투레그 매치 결승에서 토리노를 이기며 첫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란데 토리노'의 강림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베니토 무쏠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영어식 이름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럽의 이름은 아쏘치아키오네 칼치오 토리노로 바뀌었고 그들은 어니스트 업스타인의 지도로 1938-39시즌 세리에를 2위로 마쳤다.

2차 대전의 발발로 유대인 감독은 헝가리로 돌아갔지만, 칼치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의 기초는 이미 자리잡은 상태였다. 토리노는 전쟁이 축구를 삼키기 전인 1943년 세리에 A 우승을 이뤘으며, 종전 후에도 4차례 더 스쿠데토를 따냈다.

1946-47시즌에는 100골 이상을 넣었으며, 1947-48시즌엔 125골을 넣었다. 토리노의 주장이자 인테르 레전드 산드로의 아버지인 발렌티노 마쫄라에 영감을 받은 토리노는 상대팀 대부분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더비는 언제나 치열한 경기였다. 1947년 헝가리를 3-2로 이긴 이탈리아 대표팀은 10명의 토리노 선수와 유벤투스 골키퍼 루치디오 센티멘티로 구성되어있었다. 

1948-49시즌 종료가 가까워졌을 때, 토리노는 유벤투스의 5연패 기록에 나란히 서기 직전에 있었다. 업스타인이 테크니컬 디렉터로 팀에 복귀했으며 4경기를 남겨놓고 2위에게 4점차로 앞서있었다. 당시엔 승리 승점이 2점이었으므로 이것은 굉장한 차이였다.

모두가 인정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팀으로서, 그라나타는 포르투갈 벤피카에서 열리는 주장 프란시스코 페레이라를 기리는 친선전에 초청되었다. 그것이 그들이 함께 뛰는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포르투갈에서 팀을 싣고 오는 비행기가 토리노에 근접했을 때, 도시는 강한 남서풍이 불었고 안개로 둘러싸여있었다. 파일럿 피에르루이지 메로니는 관제 타워에 최종 하강을 하기 전 수페르가 쪽으로 질러가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 뒤에 있었던 일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강풍이 기체를 오른쪽으로 몰아붙였다는 설과 고도계의 결함으로 예상보다 더 낮게 비행했다는 설이 있었다. 5월 5일 17시, 비행기는 바실리카 뒤의 경사면을 들이받았다. 나쁜 시야로 인해 메로니는 비상 탈출 시도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탑승한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토리노는 남은 4경기에 유스 선수들을 내보냈고, 상대팀 또한 유스 선수를 필드에 올렸다. 결국 1949년의 스쿠데토는 기록에 올랐다. 이 기록은 현재의 유벤투스에 의해 깨졌지만, 전쟁과 수페르가 비극이 아니었다면 그란데 토리노는 분명히 더 많은 우승을 거뒀을 것이다.

그라나타는 이 비극에서 완전히 회복한 적이 절대로 없지만, 더비는 계속해서 열정을 유지했다. 어쩌면 토리노의 두 팀 모두가 힘든시기로 떨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유베는 수페르가 이후 첫 우승을 거뒀지만, 그 뒤의 7시즌에서는 단 하나의 스쿠데토밖에 이루지 못했다. 올드 레이디의 높은 기준에 비하면 가뭄에 가까웠다.

이 시기 최고의 이름을 계승한 건 밀란의 클럽들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토리노 클럽이 정상에 돌아왔다. 1971-72시즌엔 두 팀의 극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유벤투스는 토리노를 단 1점차로 누르고 스쿠데토를 획득했다. 유베는 그 후 세 시즌 중 두 번 우승을 했지만, 1976년 우승은 토리노의 적갈색 팀에게 돌아갔다.

지난 주 작고한 루이지 라디체가 지도한 그라나타는 데르비 델라 몰레 두 경기를 모두 2-0으로 이겼으며, 결과적으로 유베에게 2점차로 앞서 우승까지 이뤘다. 이것이 토리노의 마지막 우승으로 남아있다.

1990년대 초 토리노의 짧은 부활의 시기 외에는, 유벤투스는 그 후 언제나 탑 독의 위치에 있었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의 위대한 팀이 1980년대에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승리를 거머쥐었고, 마르첼로 리피도 그 다음 시대에 비슷한 성취를 이루었다.

두 팀이 스타디오 델레 알피를 공유하는 동안 그들의 운명은 명확히 대조되었다. 토리노는 느리고 뼈아픈 쇠퇴를 겪었고 2005년 파산으로 저점을 찍었다. 다음 시즌 유벤투스는 칼치오폴리 스캔들로 인해 세리에 B로 강등되었으며 도시 라이벌과 마주쳤다.

두 팀은 그 후에도 고난을 겪었다. 토리노는 2부리그를 전전했고 유베는 두 시즌을 7위로 마쳤다. 그러나 안토니오 콘테의 부임과 그 이후의 알레그리 감독 덕분에 올드 레이디는 정상에 복귀했으며, 지난 7년간 스쿠데토를 거두고 4연속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뤘다.

스쿠데토 도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라나타는 토요일 경기에서 리그 6위팀으로서 등장할 것이다.

데르비 델라 카피톨레가 더 열정적이고, 밀라노 데르비가 더 유명할 순 있지만 이 경기가 양 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몇몇 유벤투스 팬들은 '그들에게나 중요한 경기'라고 폄하하지만, 데르비 델라 몰레에 얽힌 양 팀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경기장에 들어가보는 수 밖에 없다.

헤이젤 참사를 조롱하는 챈트나 수페르가 비극을 조롱하는 걸개 등 때때로 도를 넘은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토리노 더비는 모든 "스트라치타디네(더비)"중 가장 저평가된 매치업일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어떤 도시도 토리노보다 더 많은 스쿠데토를 자랑할 수 없다. 그리고 토리노는 자신들이 100년전 갈라져나온 클럽에게 이번 시즌 첫 패배를 안길 주인공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비록 안드레아 아넬리가 드레싱룸에 갇히는 일은 일어나지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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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ootball-italia.net/132041/titles-and-tragedy-tu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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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20-21 써드아케 Lv.52 / 87,162p

Win the 57th match.
제 글은 당사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추천 자제좀ㅠ 알림이 너무 많이와요..

댓글 1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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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멋진 글이네요. 수페르가의 비극이 없었으면 아주리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더 오래 이어나갈 수 있었을텐데 이 사고로 꽤나 오랫동안 헤맸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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