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 20-21 써드아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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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일 22시 18분

피오렌티나 대 유벤투스의 원한서린 경기는 열을 올린 수 십 년의 역사와 논쟁으로 돌아간다.

by Anthony Barbagallo.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에서 40,000명의 비올라 팬이 보라색 깃발과 배너로 바다를 이루며 '오 피오렌티나'를 목청높여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현재 비안코네리 선수들은 8,90년대에는 있지도 않았지만, 꾸르바 피에솔레의 울트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벤투스 팀을 향해 "라드리ladri(도둑들)"같은 말들을 내지른다. 이 곳이 호날두와 동료들이 오늘밤 경험할 적대적인 환경이다. 증오로 찬 라이벌 의식에 두 팀 간의 씁쓸한 기억이 상기되는 곳은 오직 피오렌티나 뿐이다.

 

이 특이한 라이벌리는 논란과 증오심으로 구축되었다. 전형적인 지역적, 경쟁적 더비가 아니며 특히 피오렌티나의 입장에서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유벤투스의 피렌체 원정 경기가 있을 때면 원정 팬들이 흑백의 유니폼을 입고 도시의 피자집을 쉽게 드나드는 그림은 그릴 수 없다. 경기에서 있었던 논란의 장면부터 유벤투스가 비올라의 스타를 영입했던 일들까지, 이런 사건들이 이 라이벌리를 반도에서 가장 강렬한 축구계 격돌로 변모시켜주었다.

 

유벤투스가 첫 대결에서 피오렌티나를 11-0으로 이긴 것 외에는, 이 유니크한 라이벌리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불붙지 않았었다. 1981-82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유벤투스와 44점으로 동률을 이룬 상황에서, 피오렌티나는 그들의 세 번째 스쿠데토를 노릴 기세였다. 사르데냐 섬으로 536km를 떠나온 토스카나 팀(피렌체)은 강등권에 있던 칼리아리를 이긴 후 비안코네리가 칼라브리아에서 폼이 좋은 카탄자로를 상대로 미끄러지길 바래야했다.

 

당시, 피오렌티나와 유벤투스 각 팀에는 개인 능력을 빛내는 선수들이 있었다. 비안코네리엔 클라우디오 젠틸레, 쥐세페 푸리노와 가에타노 시레아로 이뤄진 시칠리안 코어가 수비-중원 라인을 탄탄하게 지켰다. 여기에 디노 조프와 파올로 로씨 등의 다른 선수들이 가세해 유베를 상대하기 버거운 팀으로 만들었다. 비올라에도 재능으로 가득찼다. 몇 명만 읊어보자면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안토넬로 쿠쿠레두와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등이 있었다. 

 

전반전이 득점없이 끝난 칼리아리-피오렌티나 경기 후반전, 질리아티는 그들의 포워드 프란체스코 그라지아니로 침묵을 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우리지오 마테이 주심은 득점 과정에서 칼리아리 골키퍼에 대한 파울이 있었다고 판정하며 골을 취소시켰고, 피오렌티나 팬들은 당황했고 격노했다.

 

피오렌티나가 사르디냐의 중심지에서 역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유벤투스 또한 카탄자로의 끈질긴 모습에 교착상태를 모방하는 듯 보였다. 칼라브리안 팀은 페널티킥을 놓쳤다. 반면 유베의 리암 브래디는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올드 레이디는 1-0으로 승리해 팀 통산 20번째 스쿠데토를 새길 수 있었다. 논란이 일었던 판정에 분노한 카를로 안토뇨니는 비올라의 세 번째 세리에 A 타이틀을 앗아간 이 상황을 도둑질이라 표현했다. 이 예외적인 사건으로 두 팀 사이는 이탈리아의 가장 치열한 라이벌로 접어들게 된다. 

 

1981-82시즌의 엇갈림 이후, 유벤투스는 승승장구하여 그 연대에 두 개의 세리에 A 타이틀을 추가했다. 피오렌티나는 그들의 모순이 복잡한 불운으로 나타났다. 그 후 1989-90시즌에 이르러 유벤투스와 피오렌티나의 라이벌리는 다시 점화되기 시작한다. 비올라는 리그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내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팀을 1990 UEFA 컵 결승으로 이끈 부적 같은 포워드 로베르토 바지오가 있었다. 피오렌티나가 만날 수 있었던 다른 모든 팀 중에서, 맞은 편엔 서있는 결승 상대는 다시 그들에게 가장 쓰라린 유벤투스였다. 대회 역사상 첫 이탈리아 팀 간의 결승으로서 세계의 관중이 그들의 날선 대결을 맛보게 될 참이었다.

 

기대를 사로잡은 이 결승은 2차전으로 치뤄졌다. 1차전은 토리노에서 열렸고, 당시 아르테미오 프란키는 1990년 월드컵에 대비해 재정비 중이었던 관계로 아벨리노에서 2차전을 가졌다. 피렌체는 4강에서 베르더 브레멘을 만나 홈 구장이나 다름없던 페루지아의 스타디오 레나토 쿠리에서 경기를 가졌지만, 비올라 서포터의 경기장 난입 사태로 인해 다른 임시 홈 구장을 마련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피오렌티나는 연고지에서 500km 이동했다는사실 뿐 아니라,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수많은 유벤티노를 보유한 것이 또한 클럽과 팬들에게 근심거리였다.

 

 

토리노에서의 1차전은 논쟁적인 상황으로 결론난 또 한 번의 전형적인 피오렌티나 대 유벤투스 매치였다. 토리노의 거인은 토토 스칼라치가 뒤로 내준 공을 시칠리아인 동료 로베르토 갈리아가 넣으며 3분만에 1-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7분 후 피오렌티나의 레나토 부소가 크로스를 받아 중요한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팽팽한 경기는 1-1로 끝날 법도 헀지만, 경기 59분에 애매한 판정이 과열 양상에 불꽃을 피웠다. 유베의 피에르루이지 카시라기가 2-1로 달아나는 골을 넣었지만, 주심은 그가 득점 과정에서 피오렌티나 수비수 첼레스테 핀을 미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시 한번 비올라 서포터들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유벤투스는 결국 73분에 3-1까지 만들어내며 2차전에 앞서 우세한 위치를 선점했다. 경기 후 몇몇 피렌체 선수들과 팬들이 외친 말이 바로 "라드리(도둑들)"였다. 아벨리노에서의 2차전 지알라티는 바지오, 부소, 둥가와 마르코 나피가 침묵하며 무력화되었다.

 

연배가 있는 비올라 서포터들은 1981-82시즌 세리에 A, 1990 UEFA 결승의 고통을 견뎌내야했고, 1990년 바지오의 유벤투스 이적으로 살얼음같던 양 팀 팬들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일 디빈 코디노는 세계 기록은 8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매각되었고, 피렌체 길거리에 혼돈을 불러왔다. 그리고 유벤투스가 1991년 다시 아르테미오 프란키를 방문했을 때, 바지오는 비올라의 골키퍼 지안마테오 메레지니가 자신의 슛 방향을 알고 있다며 페널티킥을 차길 거부했다. 루이지 데 아고스티니가 대신 키커로 나섰고 메레지니가 막아냈다.

 

교체되어 나온 바지오는 그 곁에 떨어져있던 피오렌티나 머플러를 집어 아무렇지도 않게 목에 둘렀다. 그의 놀라운 행동은 많은 칼치오 팬들과 미디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경기 후 바지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은 언제나 보라색이다"는 감성어린 코멘트를 남겼다. 이것은 비올라 티포지들에겐 따뜻한 제스쳐였던 반면, 몇몇 유벤투스 서포터는 씩씩거렸다.

 

 

바지오가 비안코네리의 전방에서 득점을 쌓던 1993년,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B에서 뛰고 있었다. 하지만 비올라 또한 그들의 스타를 뽐냈다. 바로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피오렌티나의 믿을맨 듀오인 바티스투타와 후이 코스타는 이 시기에 클럽에게 거대한 국내 성적을 안겨주었다.

 

두 번의 코파 이탈리아와 두 번의 4위, 이 성과는 비올라 팬들이 가장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토스카나엔 더 이상 바지오가 필요없었다. 그들에겐 바티스투타가 있었기에. 라 베키아 시뇨라 또한 1990년대 중반 성공적인 시기를 즐기고 있었다. 특히 1995-96시즌엔 마르셀로 리피가 팀에게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바티스투타가 2000년 피오렌티나를 떠난 후 비올라는 기울었다. 지알라띠는 2002년 파산을 선언했고, 델라 발레 형제는 클럽을 인수하고 '피오렌티나 비올라'로 개명했다. 세리에 C에서 뛰며 적인 유벤투스가 27번째 스쿠데토를 거는 모습은 비올라 서포터들에겐 삼키기 어려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3부 리그에서 뛴 한 시즌 동안에도 피오렌티나는 크리스티안 리가노와 안젤로 디 리비오 같은 출중한 중원, 전방 자원을 자랑했다. 두 클럽 레전드는 2004년 비올라의 세리에 A 승격에 일조했다.

 

유벤투스는 승승장구하고 피오렌티나는 파산의 상처를 보듬던 와중에, 2006년 칼치오폴리 스캔들이 두 클럽을 강타했다. 유베는 세리에 B로 강등되고 두 번의 우승을 박탈당했고 비올라는 차시즌 승점을 15점 감점당했다.  피오렌티나 팬들은 라이벌이 2부리그에서 뛰는 걸 보며 처음으로 우월감을 맛볼 수 있었다.

 

2013년 빈첸조 몬텔라의 피오렌티나가 유벤투스를 4-2로 꺾으며 팬들을 희열의 나라로 보내버렸다. 이것은 피오렌티나가 15년만에 홈에서 비안코네리를 꺾은 경기였다. 전반전 2-0으로 뒤지던 지알라티는 후반전에 쥐세페 로씨의 해트트릭으로 믿기 힘든 역전을 일궈냈다. 맞선 팀도 여느 유베가 아니었다. 착실히 훈련받은 안토니오 콘테의 유벤투스였다.

 

 

지난 세월 피오렌티나와 유벤투스의 라이벌리가 필드 위에서의 일들로만 악화되었다면, 최근 양 클럽의 앙금은 이적시장에서 더욱 누적되는 추세다. 비올라가 유베에게 이탈리아인 영재를 잃은 것은 바지오가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다. 2017년 중반, 페데리코 베르나르데스키는 토스카나 클럽과 재계약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고, 그를 40m 유로에 손에 넣은 클럽, 유벤투스에 승선했다.

 

베르나르데스키가 토리노로 떠나기 전 험악한 욕설을 받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난 시즌 그의 피렌체 방문에 사람들은 적개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 경기는 24살의 그가 여태껏 비안코네리로 뛴 경기 중 최고였다. 홈 서포터들을 침묵시키고 비안코네리의 2-0 승리를 도운 그의 프리킥 골을 잊을 피오렌티나 팬은 없을 것이다. 대담한 베르나르데스키가 전 소속팀 팬들 앞에서 세레머니를 하는 장면은 많은 유벤티노가 만끽하는 장관이었다.

 

베르나르데스키가 이번 매치업에서 얼마간 뛸 가능성이 상당하기에, 이 토스카나인 윙어가 피렌체에 멘붕을 일으키는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가장 최근 피오렌티나가 그들의 극심한 라이벌을 꺾은 것은 키에사가 부폰과 BBC 수비진을 괴롭히며 2-1로 승리했던 두 시즌 전의 경기였다. 유럽에서 가장 젊은 팀 중 하나인 피오렌티나가 키에사와 지오반니 시메오네라는 무기로 이 노련한 팀을 꺾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관전 포인트가 또 한번의 클래식한 피오렌티나와 유벤투스의 씁쓸한 이야기를 장식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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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ootball-italia.net/131439/fiorentina-juventus-anatomy-rivalry

 

 

 

Profile
title: 20-21 써드아케 Lv.52 / 87,162p

Win the 57th match.
제 글은 당사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추천 자제좀ㅠ 알림이 너무 많이와요..

댓글 1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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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2

베르나가 골넣고 아스토리 추모 세레머니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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