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3일 20시 55분

팀 : 유벤투스

리그 : 세리에 A

감독 :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주요 득점자 : 미셸 플라티니, 즈보그니엑 보니에크, 파올로 로시

성적 : 컵 위너스컵 우승, UEFA 슈퍼컵 우승, 유로피언 컵 우승

 

지난 두편의 글에서 우리는 현재의 유벤투스 수비와 과거의 유벤투스 수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봤다. 이번 글에서는 유벤투스의 공격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84/85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수비력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오마르 시보리와 존 찰스가 있던 시절과 맞먹는 공격진, 플라티니와 로시 그리고 보니에크로 이어지는 삼각편대가 유벤투스의 공격을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들은 아이러니하게 82/83시즌을 앞두고 동시에 영입 됐으며 플라티니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룩하고 유벤투스를 떠난다. 최고의 선수진들을 보유했었지만 유로피언 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우승이 없었던 유벤투스였고, 심지어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삼각편대인 존 찰스, 오마르 시보리,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가 있던 때도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비안코네리들에게 84/85시즌 달성했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남달랐을 것이고, 이 우승으로 유벤투스 왕조는 이렇게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원동력이었던 유벤투스 삼각편대 시즌2, 이들에 대해 파헤쳐보겠다. 

 

 

 

 

No.9, 월드컵의 황제, 파올로 로시

파올로 로시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태어났다. 72/73시즌부터 유벤투스의 일원이었던 그는 인터 콘티넨탈컵에서 준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기록했 지만 로시는 첫시즌에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뛸수가 없었고, 그는 코모로 가기전까지 3시즌동안 유벤투스에서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세리에 A 경험을 위해 코모로 떠났고, 75/76시즌 데뷔를 하여 6경기를 뛰었지만 이때도 한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는 바로 비첸자로 임대를 갔을 때 였다. 당시 비첸자 감독 파브리에 의해 그는 윙에서 공격수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포지션을 바꾸자마자 로시는 21골을 기록하여 세리에 B 득점왕을 따며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이 로시의 환상적인 플레이 덕분에 다음시즌 세리에 A로 승격을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세리에 A로 승격한 첫 시즌 77/78시즌 세리에 A 2위를 기록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이 성적에 뒷받침에는 로시의 24골이 있었고, 로시는 득점왕 타이틀을따며 세리에B, 세리에 A 두 리그 득점왕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후에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두번째로 타이틀을 얻는다.) 

 

이런 환상적인 공격수를 아주리 군단은 놓치지 않았고, 당시 사령탑 베아르조트의 눈에 띄어 78년 월드컵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는 벨기에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고, 당시 이탈리아는 1대0으로 이긴다. 로시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명성을 얻게 됐고, 중앙 공격수와 오른쪽 윙을 왔다갔다하며 경기를 뛰었다. 파올로 로시의 등장으로 당시 오른쪽 윙이었던 프랑코 카우시오가 왼쪽 윙, 왼쪽 윙이었던 로베르토 베테가가 중앙공격수로 이동하게 되면서 카우시오, 베테가, 로시라는 최고의 삼각편대를 이룬다. 

 

78년 월드컵에서 아주리 군단은 4위를 기록했고, 파올로 로시는 3골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 대회에서 로시는 실버볼을 수상했고, 이탈리아의 대회 첫 골이자 로시의 첫 골은 프랑스를 2대1로 이긴 개막전에서 기록한다. 이러한 활약으로 로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선수가 된다. 78년 월드컵후 78/79시즌 로시는 15골을 기록했고 비첸자와 함께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다 치루지 못했고, 로시의 부재로 비첸자는 세리에 B로 강등된다. 이후 로시는 세리에 A에서 뛰기 위해 페루자로 이동한다. 페루자에 있는 동안 로시는 13골을 기록했고 UEFA컵 16강 진출을 돕기도 했지만 1980년 약물 파동에 걸리면서 3년동안 선수생활 실격 처분을 받는다. 후에 2년으로 줄여지긴 했지만 자국에서 열린 1980 유로에 참가하지 못한다. 로시는 아직도 자기는 피해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선수생활을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는 그를 영입했고, 81/82 시즌 마지막쯤에 모습을 들어내 3경기 1골을 기록한다. 로시는 1982 월드컵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지만, 당시 로시의 몸은 말이 아니었고, 이탈리아는 꼭 1위를 해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와 같은 조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지코의 브라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로시는 이 대회 전 예선에서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여주지 못해 우려를 자아냈고, 이탈리아의 1위는 꿈으로 보였다. 

 

RKvStub.png

(브라질의 황금 4중주에게 로시는 헤트트릭으로 답했다.)

하지만 파올로 로시는 이러한 우려를 완벽하게 불식시킨다. 디펜딩 챔피언이자 축구 신 마라도나가 있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이탈리아는 2대1로 이긴다. 젠틸레와 시레아의 완벽한 수비, 그리고 로시와 카브리니의 골로 이탈리아는 디펜딩 챔피언을 물리치더니 지코, 소크라테스, 팔카오가 있는 브라질을 3대2로 이긴다. 여기서 로시는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다. 여기에 폴란드와의 준결승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결승진출을 이끌어냈고,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젠틸레의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아주리 군단에 3번째 우승을 일궈낸다. 대회 6골로 파올로 로시는 대회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골든볼을 수상한다.

 

환상적이었던 82년 월드컵을 뒤로하고 유벤투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던 로시는 83년 코파이탈리아 우승을 일궈냈지만 82/83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 패배를 경험한다. 코파이탈리아에서 5골, 챔피언스리그에서 6골을 기록했고, 유벤투스는 세리에 2위를 기록한다. 83/84시즌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고, 세리에 13골을 기록, 팀의 스쿠데토 획득에 일조한다. 그리고 84/85시즌 미셸 플라티니, 보니엑과 함께 로시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토너먼트에서 5골을 기록하여 미셸 플라티니, 톰 닐슨에 이어 득점 3위를 기록한다.

 

84/85시즌이 끝나고 로시는 밀란으로 이적을 한다. 밀란에서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밀라노 더비에서 2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86년 월드컵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부상으로 그 대회에는 참가를 못했고, 나폴리에서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로시는 이 경기를 끝으로 아주리 군단에서 은퇴를 한다. 그리고 86/87시즌 헬라스 베로나로 이적하여 세리에 4위하는데 일조하고 로시는 선수생활을 완전히 은퇴한다. 

 

로시하면 떠오르는 경기는 바로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한 82년 월드컵이다. 이 대회에서만 7경기 6골을 기록했고, 78년 월드컵에서 기록한 3골과함께 로시는 월드컵에서 아주리 군단 최다 득점자중 1명이다. 이 최다 득점자는 총 3명이며 똑같이 14경기 9골을 기록한 로베르토 바죠와 크리스티안 비에리다. 파올로 로시는 이탈리아 공격수 들중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되고 있고, 전적으로 피지컬로 밀어붙히는 것에는 부족했지만 빠르고 골 냄새를 잘 맡으며 우아하고 좋은 테크닉과 밸런스, 빠른 반응속도와 결정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유벤투스에서 미셸 플라티니와 보니에크와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기도 했다. 

 

PnsUz1i.png

(전성기가 매우 짧았지만 그 기간에 보여준 그의 임팩트는 엄청났다.)

 

 

 

 

No.10, 프랑스의 왕, 미셸 플라티니

70년대 세리에를 정복한 유벤투스는 이제 눈을 유럽대회로 돌렸다. 아직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던 유벤투스는 계속해서 우승을 도전했지만 73년 아약스에게 패배한 이후 결승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76/77시즌 UEFA 컵을 우승하면서 유럽대회 정복의 서막을 알린 유벤투스는 80년대로 넘어가면서 몇몇 선수들을 영입했고, 그 중 한명이 바로 미셸 플라티니 였다. 82/83시즌 유벤투스에 합류하게 된 미셸 플라티니는 오마르 시보리 이후 가장 10번다운 선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물론 플라티니의 첫시즌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의 주역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던 팀인데다가 이탈리아 축구를 어려워 했고, 이러한 부진은 미디어의 공격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겨울에 이탈리아 무대를 떠난 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기위해 플라티니와 팀 동료 즈브그니엑 보니에크는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전술 교체를 요청했고, 플라티니는 후반기부터 자신의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약으로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함부르크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준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플라티니는 전반기에 받았던 비난을 후반기에 활약을 펼치면서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플라티니는 1984년 부터 1986년까지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우승, 1984년 컵 위너스컵 우승, 1985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1985년 인터 콘티넨탈컵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82/83, 83/84, 84/85 시즌 3회 연속으로 세리에 득점왕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1984 년과 1985 년에 세계 축구 매거진에 의해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플라티니는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뛰면서 선수들에게 킬패스를 뿌리면서 어시스트를 기록하거나 본인이 직접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마시모 보니니, 마르코 타르델리가 후방에서 받쳐주고 플라티니가 전방에서 지휘했던 80년대의 유벤투스는 최강의 팀이었다. 이러한 활약덕분에 플라티니는 83, 84, 85년 3회 연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80년대 나폴리를 대표했던 마라도나의 라이벌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던 플라티니는 공격형 미드필더 였지만 공격수에 뒤지지 않는 득점력과 프리킥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선수였다.

 

헤이젤 참사로 잘 알려진 84/85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에서 열렸는데 이날은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날을 기념하는 대신 헤이젤 참사를 기념하는 날로 가려졌고, 39명이 사망하고 600여명이 부상을 당하게 됐다. 즈보그니엑 보니에크가 얻어낸 반칙으로 플라티니가 페널티킥을 찼고, 그 골이 결승골이 되면서 유벤투스는 1대0 으로 승리했다. 유벤투스가 승리하게 됐지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플라티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후에 인터뷰에서도 우리가 승리했지만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유벤투스 역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지만 기쁨과 동시에 비극도 있었던 시즌이었다. 어찌됐든 84/85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UEFA 주관 최초로 모든 대회를 우승한 팀이 됐고, 후에 트라파토니는 퍼거슨 다음으로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게 된다. 프랑스 국가대표의 주장이기도 했던 플라티니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프랑스어로 왕인 "Le Roi" 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그리고 2011년 유벤투스가 새 홈구장 개최를 맞추면서 레전드 선수 50명을 뽑아 명예의 거리로 선정했는데 그 50명중 13번째로 미셸 플라티니가 뽑히게 됐다. 

 

gekkow5.png

(1984 EURO 에서 플라티니는 'THE MAN'으로 프랑스를 우승시킨다.)

플라티니는 국가대표에서도 에이스 였지만 월드컵 우승하곤 연이 없었다. 78년 월드컵에선 조별예선 탈락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티니는 프랑스 국가대표 주장직을 맡으며 82년 월드컵에 참가했고, 그의 등번호는 유벤투스에서 달았던 번호와 마찬가지로 10번 저지를 입었다. 플라티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프리킥으로 1982년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한 중요한 경기였던 81년11월 18일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어렵게 올라온 프랑스는 우승후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들은 준결승전까지 진출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비야에서 프랑스는 서독을 만나게 된다. 이 경기에서 독일 골키퍼 슈마허와 프랑스 선수인 패드릭 바티스톤과 페널티 박스에서 충돌했는데 심판은 페널티킥을 불지 않았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격하게 항의 했었다. 연장전이 진행 된 후에도 승부가 나지 않자 승부차기로 이어졌고, 플라티니는 첫번째 키커로 나서면서 페널티킥을 성공했지만 서독이 5대4로 이기면서 결승전에 진출한다. 3대3무승부로 끝나고 승부차기 끝에 서독이 올라간 이경기는 재미있게도 플라티니가 자신의 커리어 역사상 가장 기억남는 경기라고 이야기 했다.

 

플라티니는 82년 월드컵에서의 상처를 1984년 유로에서 만회하기로 결심했다. 자국에서 열렸던 유로에서 플라티니는 82년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주장을 맡아서 대표팀을 이끌었고, 이 대회에서만 플라티니는 프랑스 대표팀이 기록한 14골중 9골을 기록하면서 자국이 원했던 유로 우승을 선사했다. 플라티니 원맨쇼였던 이 대회에서 플라티니는 82년 월드컵의 4강 탈락을 그나마 치유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타 프랑스 대표팀은 86년 월드컵에선 우승을 노리기로 했다. 

 

물론 월드컵에 출전하기 전 플라티니는 사타구니 통증으로 고생을 했었지만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거의 다 회복이 됐고, 출전할 수 있는 몸상태가 되었다. 물론 정상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티니는 중요한 골을 두골을 기록했는데, 첫번째 골은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의 대결에서 2대0 승리를 거두는 데에 기록했던 골이고, 두번째 골은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였다. 

 

브라질의 카레카가 득점을 하면서 브라질이 리드를 하게 됐지만 플라티니가 자신의 31번째 생일날 통산 41골을 동점골로 기록하면서 경기는 승부차기로 이어졌고, 프랑스가 4대3으로 승리한다. 이 골은 플라티니의 국가대표 커리어 마지막 골이었고, 과달라하라에서 서독에게 또 한번 패배를 당하면서 프랑스는 3위를 기록하게 된다. 여기서 플라티니는 82년과 86년 3위 결정전에서 모두 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플라티니는 은퇴를 발표하기 몇 주전 1987년 4월 29일 유럽선수권 예선 아이슬란드와의 경기에서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다. 1976년부터 1987년까지 72경기를 뛰면서 41골을 기록했고, 이 득점 기록은 티에리 앙리가 유로 2008 예선이었던 2007년 10월 17일날 42골과 43골을 기록하면서 프랑스 최다 득점 기록은 티에리 앙리가 갖게 됐다. 

 

8xm5C6I.png(델피에로의 우상, 미드필더 였지만 그의 득점력은 탁월했다.)

 

 

 

 

No.11, 밤의 아름다움, 즈보그니엑 보니에크

즈보그니엑 보니에크의 첫 팀은 폴란드의 자비샤 비드고슈치라는 팀이었다. 2시즌 동안 41경기 14골을 기록한 후 그는 비제프 우치라는 팀으로 이적하여 172경기 50골을 기록한다. 이러한 활약을 유벤투스는 눈여겨 보고 있었고, 82/83시즌을 앞두고 보니엑을 영입한다. 플라티니, 로시와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게 된 보니엑은 컵 위너스컵, UEFA 슈퍼컵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보니엑은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드리블 스킬이 매우 뛰어난 축구선수였다. 당시 유벤투스 회장 지안니 아넬리 회장은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퍼포먼스를 보고 밤의 아름다움이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2009년 10월 12일 황금발을 수상하기도 했다. 
 
보니엑은 폴란드 국가대표료 80경기 24골을 기록했고, 82년 월드컵에서 로시의 이탈리아에게 2대0으로 패배하면서 결승진출엔 실패했지만 3위를 기록한다. 선수를 은퇴 한 후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나 레체 같은 팀의 코치생활을 했었다. 폴란드 축구협회 부회장을 하기도 했고, 2002년 7월 폴란드의 감독이 됐다.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을 포함하여 5경기에서 2승을 기록, 12월에 사임을 한다. 
 
7s4tFkS.png
(공격수로서 많은 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플라티니, 로시와 함께 84/85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주역임은 틀림없다.)

 

 

 

 

 

UEFA 주관 모든대회 우승의 방점을 찍고

로시를 제외하고 플라티니와 보니엑은 82/83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환상적인 킬패스와 높은 프리킥 능력을 갖고 있는 플라티니, 최고의 위치선정과 골 결정력을 가지고 있는 파올로 로시,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오가며 폴란드 리그를 정복한 보니엑의 합류로 유벤투스는 최고의 공격진을 만들어냈다. 

 

이 세명은 82/83시즌부터 84/85시즌까지 함께 뛰면서 3개의 유럽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플라티니는 68골, 보니엑은 23골, 로시는 36골 등 총 127골을 합작 하면서 유럽무대를 휩쓴다. 물론 파올로 로시는 피아첸자와 페루자에 있던 시절 만큼의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시즌인 84/85시즌 10경기 5골을 기록하며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터뜨린다. 최고의 골 결정력을 가지고 있던 공격진들은 80년대를 유베 왕조로 만들고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로시는 밀란으로 보니엑은 로마로 떠난다. 플라티니만이 87년도까지 있었고 플라티니 역시 유벤투스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은퇴한다.

 

정말 오로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해 모인것 마냥 이들은 우승이 끝난 후 뿔뿔이 흩어진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방점을 찍으면서 유벤투스는 UEFA 주관 모든대회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며 UEFA Plague 라는 뱃지를 받게 됐고, 이 뱃지는 유벤투스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받게 된다.(왜냐하면 인터콘티넨탈컵이 폐지되고 FIFA클럽 월드컵으로 바뀌었기 때문) 

 

이 세명이 함께 모였던 82/83시즌 10년 뒤에는 델피에로와 트레제게, 네드베드의 삼각편대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끈다. 하지만 84/85시즌 처럼 우승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2009년 네드베드가 은퇴하기 전까지 약 10여년동안 발을 맞추며 유벤투스와 함께한다. 마법의 트리오 시즌 1 시보리와 찰스, 보니페르티에 이어 시즌 2인 로시와 보니엑, 플라티니, 그리고 델피에로와 트레제게 네드베드 까지 환상적인 공격수들과 환상적인 조력자들로 이들은 유벤투스를 매 경기 승리로 이끌었다. 

 

이제 마법의 트리오 시즌4가 만들어질 차례다. 디발라와 이과인이라는 아르헨티노 공격수 듀오는 완성됐다. 이제 이들을 받쳐줄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 조력자가 피아니치가 될까? 아니면 새로운 선수가 이들을 받쳐줄까? 유벤투스는 마지막 퍼즐을 찾고있다. 플라티니 같은, 네드베드 같은 선수들을 말이다. 유벤투스의 이적시장은 끝나지 않았다.

 

pNgZ4Lq.png

(9번, 10번, 11번. 이 환상적인 트리오의 뒤를 이을 남자들은 누가 될 것인가?)

 

 

PS: 9박 10일 휴가의 방점입니다. 후......... 이 글을 끝으로 쓸 글은 없습니다. 내일이 자대복귀라 허허;;; 뭔가 휴가 복귀를 앞두고 글을 엄청써대네요. 흐힣 어쩌다보니 포지션별 시리즈 칼럼을 썼네요 ㄷㄷ... 플라티니 글은 전에 쓴 적이 있어서 그 글에서 그대로 복붙했습니당 헤헿 보니엑은 뭐 자료가 없어서 나머지 두선수들 보다는 매우 짧습니다 ㅠㅠ

 

 

유벤투스 포지션별 시리즈

 

수비수 

http://www.juventus.kr/football/3596477

 

미드필더

http://www.juventus.kr/football/2733568

Profile
유베의심장부폰 Lv.30 / 10,350p
15.7.21 ~ 17.4.20
댓글 7 건
프로필 이미지
2016-08-03

삼각편대하면 시보리 찰스 보니페르티도 뺴놓을수 없는데 아쉽군요

고건 ITALIA10님이 쓴 글이있습니다.

 

http://www.juventus.kr/index.php?mid=football&search_keyword=ITALIA10&search_target=nick_name&page=5&document_srl=2413943

프로필 이미지
2016-08-03
믿고보는 심장님 글!!
프로필 이미지
2016-08-03
추천
3

iaquinta_diego_amauri_roma_juve.jpg

 

001diego_iaquinta.jpg

 

epa01901085-rom43-juventus-players-diego

 

삼각편대에도 슬픈 전설이 있다고 한다....

 

 

 

프로필 이미지
2016-08-03

9번 이과인 10번 디발라 11번 피아차 

피아차가 월클급으로 커준다면 마지막퍼즐이 완성되는것 같네요!

프로필 이미지
2016-08-03
잘 읽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6-08-03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양질의 글 !!! 감사드려요

이동
겔러리 목록
공동구매 마켓 아이콘샵 출석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