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4일 22시 52분

팀 : 아탈란타 BC

리그 : 세리에 A

창단년도 : 1907년

애칭 : La Dea, Nerazzurri, Orobic

 

각 리그마다 뛰어난 유스들이 많이 배출되는 곳이 한 팀씩은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사우스햄튼, 스페인에서는 바르셀로나, 독일에서는 뮌헨등이 있다. 이탈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그 팀은 바로 아탈란타였다. 아주리 군단의 뛰어난 재능들을 뽑아내는 곳이 바로 이 아탈란타라는 팀이고, 올 시즌 자신들의 뛰어난 유스와 함께 세리에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물론 몇일전 인테르와의 경기에서 7대1로 대패를 당하면서 이들의 돌풍은 잠잠해지긴 했지만 아탈란타가 주목받고 있는 건 비단 돌풍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린 재능들이 팀을 이끌고 있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선수로 칼다라, 갈리아르디니, 캐시에등이 있다. 칼다라는 센터백으로써 아주리군단의 미래로 불리우기 시작했고, 갈리아르디니와 캐시에는 미드필더로써 뛰어난 활약을 펼쳐나갔다. 이런 재능들을 명문클럽들이 놓칠리가 없었고 수비의 핵심 칼다라는 유벤투스와 계약 후 17/18시즌까지 아탈란타에 남기로 했고, 갈리아르디니는 인테르로 이적, 캐시에는 EPL 클럽들에게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아탈란타의 유스들이 프로무대에서 뽐내기 시작한건 이번뿐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에타노 시레아라는 최고의 선수또한 아탈란타 유스의 산물이었다. 그들이 캐내는 보석들은 아주리 군단의 밝은 미래들이었고, 이탈리아의 축구 혈맥이 끊기지 않는 이유였다. 역사적인 아탈란타 유스의 첫번째 작품이 1960년에 탄생한다.

 

 

 

 

아탈란타 유스의 개척자, 안젤로 도멩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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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로 도멩기니,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 헤트트릭)

1941년 8월에 태어난 안젤로 도멩기니는 무려 9명의 형제가 있는 대가족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14살 때 부터 공장에서 일한 후 저녁때 축구연습을 했었다. 베델로와의 여름 토너먼트에서 돈 안토니오는 그를 눈여겨 봤고 아탈란타 유스에 입단 시킨다. 도멩기니는 초반에는 왼쪽으로 뛰다가 포지션을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그 후 도멩기니는 이탈리아 역사상 오른쪽 윙어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레전드로 남게 된다. 

 

1960년도에 1부리그에서 뛰게 된 도멩기니는 아탈란타를 떠나기 전인 64년도까지 69경기를 뛰며 17골을 기록했다. 도멩기니는 청소년 때 부터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고, 엘리트코스를 밟은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경기를 봤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이야기 했다. 

 

62/63시즌 도멩기니는 아탈란타 뿐만아니라 이탈리아 전체에 큰 인상을 심어주는데, 그것은 코파 이탈리아 토리노와의 결승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여 아탈란타에게 우승컵을 선사했던 경기였다. 이 경기를 인테르는 안젤로 도멩기니의 영입을 원했고, 도멩기니는 정든 고향을 떠나 또다른 네라쭈리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마법사라 불렸던 인테르의 전설적인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를 만나면서 더욱더 날개를 달았고, 그의 동료로는 산드라 마쫄라, 루이스 수아레즈등이 있었다. 그리고 도멩기니는 이들과 함께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연다. 도멩기니는 인테르로의 이적이 확정되고 난 후 곧바로 차를 샀고, 그 차를 타면서 유럽 컵과 인터콘티넨탈 컵을 정복했다. 도멩기니는 인테르의 유니폼을 입고 134경기 50골을 기록하여 그란데 인테르의 주역중 한명으로 꼽힌다. 

 

환상적인 플레이로 이탈리아의 오른쪽을 지배한 도멩기니는 인테르에서 2개의 스쿠데토와 1개의 유로피언컵을 획득했다. 하지만 도멩기니에게 있어 가장큰 업적은 바로 69/70시즌 지지 리바와 세르지오 고리와 함께 칼리아리에서 획득한 최초의 세리에 챔피언 타이틀 이었다. 이후 68년도에는 유로 결승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여 2차전을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후 이탈리아는 리바와 아나스타시의 골로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1970 월드컵에서는 결승전까지는 진출했고, 브라질에게 4대1로 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친다. 

 

1977년 부터 코치 경력을 시작한 도멩기니는 많은 팀들을 맡았지만 90년대 초반에는 인테르에서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그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으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탈란타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에 헤트트릭을 기록한 도멩기니의 플레이는 아탈란타의 미래들에게 항상 보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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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데 인테르, 칼리아리의 세리에 최초 우승, 그는 아탈란타 유스의 서막이었다.)

 

 

 

 

 

 

 

볼로냐의 레전드, 쥐세페 사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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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시절과 나폴리시절의 사볼디)

쥐세페 사볼디는 아탈란타 저지를 입고 1965년부터 세리에 무대에 발을 들인다. 코파이탈리아 대회에서 본격적으로 데뷔를 한 사볼디는 비첸자와의 경기에서 데뷔골도 성공시킨다. 또한 아탈란타가 피오렌티나와 1대1로 비긴 경기에서 출전하며 세리에 a 무대에서도 데뷔전을 치뤘다. 그는 아탈란타의 윙어 푸리첼리와 교체되면서 출전했고, 그의 포지션은 왼쪽 윙이었다. 또한 0대0으로 비긴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도 출전하며 푸리첼리와 경쟁을 벌이는듯 했으나, 5일 뒤에 그것은 꿈이었고 심지어 푸리첼리의 대체자인 스테파노 엔젤리와 함께 아탈란타 유스에서 계속해서 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10월 24일 다시 1부리그로 콜업 됐고, 라치오와의 경기에서도 출전했는데 그때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이후 사볼디는 포지션을 다시 중앙 공격수로 옮긴다. 1966년 1월 유벤투스와 1대1로 비긴 경기에서 공격수로 출전을 했고, 6월 Rappen cup에서 2경기를 뛰며 2골을 기록, 프로 첫해에 9경기 3골을 기록한다. 

 

66/67시즌 사볼디의 첫골은 라치오 전에서 터졌다. 10월 20일 롬바르디 더비에서는 브레시아를 상대로 자신의 첫 멀티골을 기록하여 팀의 2대1 승리에 보탬이 된다. 이후 사볼디는 레체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했고, 시즌 마지막날 포지아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여 첫해보다 더 많은 26경기 5골을 기록한다. 이후 사볼디는 다른 세리에 팀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지만 아탈란타에 남았고, 67/68시즌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대결한 이탈리아 컵대회에서 공격수로 출장한것을 시작으로 아탈란타의 20세는 주전 공격수로 발돋움하여 27경기 12골을 기록, 자신의 첫 두자리수 골을 기록했다. 

 

1968년 볼로냐로 둥지를 옮긴 사볼디는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며 72/73시즌에는 17골로 지안니 리베라와 파올로 풀리치와 함께 득점 1위를 기록, 73/74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들었다. 사볼디는 볼로냐에서 6시즌동안 201경기를 뛰며 85골을 기록했다. 사볼디는 볼로냐에서만 총 140골을 기록하여 볼로냐의 역대 최다 득점자중 4위에 올라섰다. 사볼디는 볼로냐가 리그 우승을 할 수 있을만한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엘레니오 에레라가 있던 로마로의 이적이 실패하면서 더욱더 좌절했다. 거기다가 밀란과 유벤투스로도 이적을 하지 못하였고, 볼로냐는 사볼디를 나폴리로 이적시키는데 당시 이적료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이적료였고, 2년전 아약스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크루이프의 이적료와 같은 이적료를 기록했다.

 

당시 나폴리는 지난 두시즌동안 3위와 2위로 마쳤기 때문에 파르테노페이 감독은 사볼디가 나폴리의 리그 우승 달성에 마지막 퍼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폴리에서의 첫시즌이던 75/76시즌 사볼디는 초반 7경기에서 7골을 기록하여 동화를 만들어 내는 듯 했으나 사볼디는 무너져 가는팀으로 이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반에만 해도 사볼디는 스쿠데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올림피코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3주가량을 결장했는데, 홈에서 아스콜리와 무승부를 기록한 후 나폴리는 무너졌고 그 시즌 5위를 달성했다. 그후 다음시즌 9위, 사볼디의 마지막시즌이던 해에도 7위까지 떨어졌다. 

 

4년동안 나폴리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총 77골을 기록했고, 그중 12골은 78년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서만 나왔다. 이 기록은 지안루카 비알리가 삼프도리아에서 10년동안 뛰면서 만든 기록과 동일한 기록이다. 그 후 79년, 나폴리를 떠나면서 스쿠데토 열망을 접었고, 볼로냐로 돌아와 79/80시즌 29경기 11골을 기록하였다. 82/83시즌 고향팀 아탈란타로 다시 복귀를 했고, 이 시즌이 사볼디의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이었다. 사볼디는 총 405경기에서 168골을 기록하여 세리에 역대 최다득점자중 13위에 랭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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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즌 코파 이탈리아 12골은 가히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또 하나의 월드클래스, 로베르토 도나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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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시절의 로베르토 도나도니)

1982년 아탈란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도나도니는 83년 세리에 C1 우승과 세리에 B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 후 1986년 AC 밀란으로 이적한 후 도나도니는 80년대 후반 이탈리아와 유럽을 지배했던 밀란 제너레이션의 한 축을 담당한다. 90년대 중반 대체로 우측 윙어로 뛴 도나도니는 사키의 밀란과 카펠로의 밀란을 모두 경험하며 스쿠데토 6개, 유로피언 컵 3개, 이탈리아 슈퍼컵 4개, 유럽 슈퍼컵 3개, 대륙간 컵 2개를 획득하였다. 

 

밀란에서의 5번째 스쿠데토를 획득한 후 도나도니는 마우로 타소티, 프랑코 바레시등의 은퇴와 카펠로의 퇴임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선수생활을 은퇴한다. 그리고 미국 MLS 리그에서 플레이, 96년 리그 베스트11에 뽑히기도 했다. 97년에는 미국생활을 접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서 카펠로와 함께, 자케로니와 함께 마지막 세리에 타이틀을 얻었다. 잠시 사우디 리그에서도 뛴 도나도니는 사우디 리그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선수생활을 끝냈고, 세리에 에서 390경기 23골을 기록했다. 

 

1986년 21세이하 유로에서 결승에 진출했던 이탈리아 대표팀의 멤버였던 도나도니는 같은해에 10월 2일 그리스를 2대0으로 물리친 경기에서 성인 대표팀 데뷔를 했다. 그 후 아주리 군단의 한 축이 된 도나도니는 준결승에 진출한 1988 유로 대회나, 3위를 기록한 1990 월드컵에 참가하는 등 주전 멤버로써 아주리 군단을 이끌었다. 또한 4년뒤 아리고 사키와 함께 출전한 1994 월드컵에서 승부차기 대결에서 브라질에게 또 패배하면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 도나도니는 디노 바죠의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준수한 모습을 선보였다. 이후 1996 유로에 참가한 도나도니는 이 대회가 마지막 국가대표 무대였고, 그의 마지막 출전은 0대0을 기록한 독일과의 경기였다.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윙어라고 평가받는 도나도니는 굉장히 빠르고 기복이 없으며 지능적인 윙어였다. 윙,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모두 소화 가능한 도나도니는 주로 뛰던 포지션은 오른쪽 윙어였다. 축구 역사의 한획을 그은 밀란 제너레이션의 주전 멤버였고, 그의 플레이와 능력은 더더욱 돋보였다. 빠른 발, 높은 테크닉, 뛰어난 드리블 기술 덕분에 상대편을 때려 눕히기엔 충분했고, 그라운드 전역을 누비고 다녔으며 전술적으로도 굉장히 유용했다. 그의 얼리 크로스 또한 일품이었고,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위협적인 킥을 선보였다. 미셸 플라티니는 도나도니에게 90년대 최고의 이탈리아 선수라고 극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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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엔 승승장구였지만 감독으로써는 좀 부진하다.)

 

 

 

 

 

워리어 제너레이션, 타키나르디와 파찌니, 몬톨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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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나르디, 파찌니, 몬톨리보)

1992년 아탈란타에서 프로경력을 시작한 타키나르디는 2시즌동안 9경기를 출전했고, 94년 유벤투스의 단장 루치아노 모지에 의해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94/95시즌 시작전에 훈련에 합류하면서 팀에 적응하는데에 어려움은 없었고, 첫시즌에 리그 25경기에 출전했고, 코파 이탈리아와 챔피언스리그에도 출전을 했다. 90년대부터 2005년까지 유벤투스에서 뛰며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스쿠데토를 획득한 타키나르디는 안토니오 콘테, 파울로 소사, 디디에 데샹, 안젤로 디리비오, 에드가 다비즈, 지안루카 잠브로타, 지네딘 지단, 마우로 카모라네시, 파벨 네드베드등 수 많은 미드필더들과 미드필더를 구성했었는데, 그 중에서 다비즈와의 콤비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유벤투스에서 뛰는 동안 타키나르디는 골을 많이 터뜨리진 않았지만 환상적인 발리슛과 중거리 슛등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었다.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높은 전술 이해도와 탁월한 태클능력으로 뛰어났던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2004년 다비즈, 잠브로타, 타키나르디, 카모라네시, 네드베드 라인이 해체된 후 에메르손, 비에이라, 비달, 포그바, 피를로 등이 유벤투스의 중원을 형성했지만 04년 때 보다도 강력했던 적은 없다고 했다. 

 

타키나르디의 전성기였던 02/03시즌 에는 리그에서 27경기 2골,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3경기 2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해에 네드베드의 부재로 ac 밀란에게 빅이어를 내주어야만 했다. 타키나르디는 가끔 부상을 입긴했지만 선수생활에 영향을 줄정도는 아니었고, 과소평가 됐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의 세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해도 무방한 선수다. 유벤투스에서 14년동안 뛰면서 300여경기를 뛰고 14골을 기록한 타키나르디는 유벤투스의 레전드로 평가 받고 있다. 

 

리피의 후임으로 유벤투스 감독으로 취임한 카펠로는 파트릭 비에이라와 페데리코 발자레티를 영입하면서 타키나르디를 비야레알로 임대를 보냈다. 이후 2006년 6월 임대가 만료됐지만 칼치오폴리 사태로 인해 1년 더 임대를 보냈고, 승격 후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된 라니에리와 함께 남으려했으나 타키나르디의 계약은 8월에 만료됐다. 그후 07/08시즌 브레시아에서 뛰면서 선수생활을 마무리 했다. 

 

지암파올로 파찌니는 아탈란타 유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며 2003년 아탈란타의 미래로 급부상하게된다. 그리고 성인무대에서 2시즌을 보내며 51경기 12골을 기록, 왼쪽윙에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바꾼다. 그 후 2005년 피오렌티나로 이적해 첫 시즌 10경기 4골을 기록했다. 파찌니는 루카 토니의 백업역할 이었고, 더군다나 알베르토 질라르디노까지 영입이 되면서 파찌니의 자리는 더 좁아졌다. 그래서 파찌니는 팀을 옮기기로 결심했고, 그는 삼프도리아로 둥지를 옮긴다. 파찌니는 삼프도리아에서 챔피언 인테르를 코파이탈리아에서 3대0 완승을 거두는 등 부활을 했고, 안토니오 카사노와 환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 두명의 투톱은 90년대 지안루카 비알리와 로베르토 만치니 듀오를 연상시키는듯 했다. 삼프도리아에서 두번째 시즌에는 19골을 기록, 09/10시즌에는 세리에 득점 3위를 기록한다. 

 

파찌니는 2011년 인테르로 둥지를 옮겼다. 팔레르모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룬 파찌니는 바리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다. 그 후 카타니아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승승장구 하는 듯 했으나 볼로냐 전에서 다시 득점에 침묵했고, 피오렌티나전에서 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무려 3개월 동안 득점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밀리토의 환상적인 경기력과 부상으로 인해 벤치에 앉아있던 시절이 더 많았고, 5골만을 기록하여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이후 인테르는 카사노를 영입하는 조건으로 파찌니를 밀란으로 보냈다. 카사노는 9월 1일 리그 2라운드에서 필리포 인자기와 비슷하게 헤트트릭을 기록하여 볼로냐를 3대1로 완파한다. 그후 11월 3일 키에보와의 경기에서 추가시간 골을 기록하며 8경기 동안의 골가뭄을 털어냈다. 이후 라치오전에서의 골을 기록하는등 파찌니는 12/13시즌 30경기 15골을 기록하여 지난시즌의 부진을 이겨냈다. 최근에는 베로나에서 뛰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아탈란타 유스아카데미를 졸업한 몬톨리보는 세리에 A 무대를 데뷔하던날 부상을 당하여 도중에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칼리아리와 파르마를 상대로 연속 골을 기록했고, 05년 1월 23일 레체와의 경기에서 첫 레드카드를 받는다. 04/05시즌 아탈란타는 강등당했고, 몬톨리보는 32경기 3골을 기록하여 준수한 모습을 보였고, 피오렌티나가 그를 영입한다.

 

피오렌티나로 둥지를 옮겼지만 피오렌티나에서의 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직 경험이 적은 선수였고, 프란델리는 몬톨리보와는 다르게 안정적인 선수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코치는 U-21세 이하로 출전을 시키며 경기감각을 쌓게 했다. 이후 피오렌티나는 칼치오폴리 스캔들이 있었으나 몬톨리보를 완전영입했고, 이시즌에 총 36경기 2골을 기록했다. 07/08시즌 엠폴리전에서 그는 최고의 모습을 선보였고, 기복이 있긴 했으나 이탈리아 최고의 재능으로 손꼽히기 시작했다. 이후 피오렌티나의 주장이었던 다리오 다니엘리가 이적하면서 주장완장을 달았고, 새로운 동료 세바스티앙 프레이와 마르코 도나델과 함께 강력한 미드필더를 형성했다. 빅클럽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오렌티나가 자신의 집이며 팀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1/12시즌 계약 만료가 다가오자 피오렌티나를 떠나고 더 높은 팀으로 간다고 선언하며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몬톨리보는 알레그리 감독의 눈에 들어 밀란으로 이적해왔는데 그의 이적료는 0원, 자유계약 이었다. 10월 30일 밀라노에서 첫골을 기록한 몬톨리보는 2대0으로 지고있던 팔레르모와의 경기에서 68분에 투입 됐는데, 이후 밀란은 2골을 기록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당시 밀란의 주장이었던 마시모 암브로시니는 갈리아니가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팀을 떠나야만 했고, 그로인해 주장완장은 자연스레 몬톨리보에게 넘어갔다. 주장완장을 얻고 카타니아와의 경기에서 골을 터뜨리며 밀란의 4연승을 이끌었으나 아일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다리가 부러지면서 6개월간 아웃 됐었다. 그 후 11월 30일 우디네세와의 경기에서 복귀했고, 팀은 2대0 승리를거뒀다. 이후로도 몬톨리보는 계속해서 AC 밀란에서 뛰고있다.

 

 

 

 

 

베르가모라는 광산에서는 또 다른 보석들이 나올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유스 아카데미가 농장, 라마시아로 불린다면 필자는 아탈란타의 유스 아카데미를 미니에라라고 부르고싶다. 이탈리아어로 광산이라는 이 단어가 굉장히 잘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값진 보석들을 캐내어 다듬고, 값어치가 올라가게 되면 제 값을 쳐주는 사람에게 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아탈란타의 유스를 미니에라라고 정한 것이다.

 

아탈란타의 유스출신들은 대부분 아탈란타에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고, 더 상위 클럽으로 이적해 자신의 이름을 유럽에 알렸다. 그 시작이 도멩기니였고, 최근이 몬톨리보 였다. 벌써부터 아탈란타의 보석들을 탐내기 시작한 명문 클럽들이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눈독들이기 시작했다. 아탈란타가 이러한 재능들을 지킬 수 있을거란 확신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으로써 아주리의 미래가 되고, 이탈리아 선수들의 위대함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명문클럽들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한 준비기간을 짧게 갖고싶으면 유스 출신들이 주전자리를 꿰차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가 그러했고, 뮌헨이 그러했다. 빅사이닝을 영입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팀의 주축이 유스 출신 일수록 팀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현재 유벤투스는 기껏해야 마르키시오 1명이 전부다. 아탈란타를 닮아야한다면 바로 유스 정책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벤투스의 많은 유스선수들이 주전 자리를 꿰 찼을 때 유벤투스는 다시 유럽깡패로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 ac 밀란의 말디니, 코스타쿠르타, 바레시, 타소티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유스아카데미 역시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 되지만 이후 이렇다할 유스선수들을 배출해내지 못한 것을 보면 아탈란타의 유스 아카데미는 훨씬 더 뛰어나고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칼다라, 갈리아르디니는 이미 타팀으로의 이적이 확정됐고, 프랑크 캐시에는 EPL 클럽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캐시에 말고도 다른 준수한 선수들이 팔리기 시작하면 아탈란타는 무너질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보석들이 그 자리를 채울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베르가모의 유스 아카데미는 또 다른 도멩기니, 또 다른 시레아와 도나도니를 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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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월드클래스가 탄생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워리어 제너레이션이 탄생할 수도 있다.)

 

 

PS : 프리뷰는 못 쓸거같습니다. 힘드네여.... 이왕 이렇게 된거 경기는보고 리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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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베의심장부폰 Lv.31 / 13,025p
댓글 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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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베르가모는 좋은 윙어들의 요람같은 곳이였네요. 글 잘 보았습니다.

네라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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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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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5

도멩기니나 사볼디는 이름만 들어봤는데 아탈란타 출신이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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