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P.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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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일 11시 56분
축구계의 거대한 신사 John Charles - 2부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

존 찰스는 1950년대에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중 한명이었다. 그의 경이적인 재능은 유럽각지에서 그를 탐내게 하였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찰스는 25살까지 세컨드디비전에 리즈 유나이티드에 남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승격의 선봉장에 서서 플레이 하였을때 그의 디비전 원의 데뷔는 1956년에 이루어졌다.

그는 디비전 원을 휩쓸었으며 38골로 득점왕이 되었다. 그가 3년전에 세운 42골의 클럽 기록을 깨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존 찰스의 루머가 돌기 시작했고 신문에서는 그가 다른 클럽에서 뛰는 것을 협상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리즈 단장은 항상 오퍼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1957년 봄, 상황이 바뀌었다. 클럽의 앨런드 로드가 9월전에 화재로 파괴되어버렸다. 그리고 메인 스탠드는 그라운드에 무너져버렸다. 적절한 보험을 들지 못하였고 클럽 부채도 증가하였다. 새 경기장 건립에 6만 파운드나 들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런 돈은 존 찰스와 같은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들을 팔아서 구할수 있었다.

존 찰스의 가능한 이적료에 대해 대륙에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갔다. 결국 클럽 단장은 4월 10일에 존 찰스를 잉글랜드의 어떤 클럽에도 팔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외국 클럽의 협상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찰스의 이적 이야기: ‘나는 감독 사무실로부터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감독은 말하였다. ‘레알 마드리드가 널 주시하고 있다.’ 나느 ‘마드리드가 누구입니까?’ 그는 날 처다보더니 ‘레알 마드리드!’ 물론 나는 이미 그것을 티비를 통해서 들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클럽중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가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어리고 해외로 나가기엔 경험이 부족하다. 곧 나중에는 그는 나를 다시 불러 나와 이야기를 하였다. 마드리드가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 그가 ‘라치오가 널 노리고 있어.’라고 했다. 나는 ‘라치오가 어디있는 거죠?’ 그는 다시 날 처다보면서 ‘로마.’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나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그리고 그는 돈이 필요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알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 이틀 뒤에는 유벤투스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유벤투스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들은 이탈리아에 최고의 팀이야.’ 나는 이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티비와 언론에서 접하지 못한것이었다.

찰스는 새로운 재능을 찾고 있던 이탈리아 에이전트인 Gigi Peronace와의 대화를 회상했다. :“그는 나의 집에 와서 나에게 당신과 같은 선수가 이탈리아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였다. 그는 영어를 잘하는 매우 뛰어난 에이전트였다.  그는 영국에서 이것저것 모으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Gigi는 라치오 팬이고 내가 그곳에 가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몇 달뒤 그는 다시 돌아와 유벤투스에서 일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유벤투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Richard Coomber는 그의 책 ‘King John'에서 그 일을 이렇게 서술하였다.:그 이적건은 리즈의 퀴즈 호텔의 233번 방에서 논의되었다.

찰스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이탈리아 에이전트를 만나기 위해 호텔로 갔었다. 그리고 나는 검은 코트를 입고 검은 모자를 쓴 리즈의 단장인 Bolton씨와 Westwood씨를 보았다. Bolton씨는 나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존, 너를 잃게 되는건 매우 슬픈일이야.’ 그러나 그들은 수표를 받자 마자 은행으로 갔다! Umberto씨가 딜의 성공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잔 하자고 했을 때 그들은 어디에도 찾을수 없었다.

“두 클럽간 협상은 매우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유벤투스는 잠시 끈질기게 값을 깍으려고 하였으나 6만5000파운드에 합의를 보았고 그들은 딜에 만족하였다.”

“아래층에는 언론사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알고 싶어하였다. 선수 계약에 동의하는데에는 보통 10분이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이나 쉬었다가 시작하였다.”

“결국 밤중이 지나서야 전체적인 합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남았다. 찰스가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었는지, 그와 그의 가족들의 투린에서의 적응문제가 남았다. 그 다음엔 특히 연골 수술을 받았던 무릎에 대한 메디컬 테스트문제가 남았다. 그것은 찰스가 경험한 가장 철저한 검사였다. 그러나 Amilcare Basatti 교수는 ‘찰스는 내가 아는 축구선수중 가장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 의사생활 중 이보다 더 좋은 상태의 사람은 본적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유벤투스의 상태였다. 그들은 강등의 위협에 시달렸었고 그것이 일어난다면 그들의 새로운 해외 스타 스트라이커의 영입은 물거품이 되는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1부리그 잔류에 성공하였고 딜을 성사시켰다. 찰스는 그의 첫 계약으로 2년동안 1만파운드를 받는 것으로 사인하였다. 주급은 적은 편이었지만 보너스로 받는 보상이 엄청났다.
타임지에 Association Football Correspondent에서 찰스의 이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정하였다. 타임지는 -찰스의 이적에 함축된 의미는 아직 숨겨져있다.  그러나 지난 시즌 찰튼 애슬래틱스에서 이탈리아로 간 Firmani의 전례를 보자면 그곳에는 축구선수에게 더욱 거대한 자극과 보상의 수단이 있는 곳일 것이다.-

“4년후 George Eastham이 힘을 실어주는 선수조합에 의한 거대한 운동 이후에 이적 시스템이 바뀌었으며 잉글랜드에서의 연봉 상한규정이 사라졌다.”

찰스는 이탈리아로 떠나기전 마지막 앨런드 로드에서 던 레비(Don Revie)가 이끄는 선더랜드와 경기를 하였다.  Geoffrey Winter는 요크셔 포스트에 이렇게 기고하였다: “어제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앨런드 로드를 떠난 존 찰스는 100여명의 그에게 사인을 받기 위한 소년들에게 둘러 쌓였었다. 축구역사의 한 장을 마쳤다. 그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셔츠를 입은 사람들(리즈 서포터즈들)에게 회자되고 또 다시 이야기될 것이다.”

“경기가 끝났을 때 존 찰스를 데리러 온 유벤투스의 스카우터인 Signor Gigi Peronace의 눈은 흥분과 만족감으로 반짝거렸다. 볼을 소유한 위대한 선수를 볼때면 언제나 ‘저 선수는 내 선수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눈이...

“선더랜드의 골마우스에서 찰스에게 불안한 사고가 있었다. 그가 엄청난 속도로 달릴 때 선수와 충돌하였다. 그리고 네트 뒤 그라운드에서 뒹굴었다. 골키퍼도 엎드린채였다. 트레이너가 달려가 처음 치료할 때 어떤 이가 ‘다리가 부러졌다’라고 외쳤다. 어느 누구도 그걸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Signor Peronace는 특히 걱정하였으며 그의 지중해로의 출발이 희미해졌었다. 다행히도 두 선수모두 무사하였다.

몇 명의 영국 선수들이 낯선 나라인 이탈리아로 찰스보다 먼저 진출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그는 많은 선수들의 이적을 하는데 길을 닦아 놓았다. 5년 후 그가 영국에 돌아왔을 때 찰스는 투린의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었다. 유벤투스의 많은 스타 중 가장 많은 성원으 받는 선수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거의 혼자힘으로 클럽에 장엄한 시대를 고취시켰으며. 그는 대륙에서 진정한 월드 클래스급의 선수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거의 혼자힘으로 2부리그를 갈지도 모르는 팀을 월드클래스로 이끌었다.

그러나 항해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찰스의 가족들이 격어야하는 많은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찰스: “투린에 대해서 들어 보았냐구요? 유벤투스가 나에게 접근했을 때 내가 이탈리아에 대해 들었다면 나는 의심했을겁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완전한 문화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리즈에서 bitter-shandy man이었어요. 갑자기 경기 전 점심때 레드 와인을 받았어요. 처음에 스파게티와 직면했을 때는 그것은 어디에나 있었어요. 강요당했죠.”

찰스는 처음 몇일간은 음식에 대해서 성가신 사람이었다. 그러나 9번의 셔츠는 그를 육체적으로 강하고 신사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유벤투스의 지독한 연고 라이벌인 토리노마저 그를 숭배할정도로 말이다.

“나는 승리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첫 번째 토리노 더비에서 나는 센터 하프를 맡았어요. 갑작스럽게 그가(토리노 선수) 제 팔꿈치에 맞고 쓰러졌어요.  
전 오직 골키퍼를 향해 돌진했을 뿐인데요. 그러나 그것은 공정치 못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전 부끄러워 공을 밖으로 걷어냈습니다. 그 선수는 치료를 받았죠.”

요즘 시대에는 거짓으로 부상인척하고 궁색한 핑계거리가 난무하는데 비해 그의 이러한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찰스에게 이것은 명예의 문제였다. “요즘의 그라운드에서 보는 수많은 속임수들을 저는 할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번도 단 한번도 심판이나 상대를 속인적이 없는가? 그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없다”고 답했다.

“어쨋든 그 순간 이후 토리노의 스포터즈들은 항상 나를 많은 존경으로 대우해주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그들이 우리를 3-2로 이기고 제가 페널티를 실축한경기를 기억합니다. 그대 저는 차들의 경적소리로 새벽3시에 일어났습니다. 제가 발코니에 나갔을 때 토리노 팬들의 휘날리는 붉은 기가 걸린 차들로 가득했습니다.”

찰스는 그들을 안으로 초청하였다. 그 후에 그들은 찰스의 비싼 와인이 있는 창고로 가서 같이 술을 마셨다. 그들은 찰스를 유베에서 나와 토리노에 와달라는 설득을 하였다.

유벤투스에는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와 오마르 시보리와 같은 위대한 플레이어가 있었다.(시보리가 골을 넣을 때면 선수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갔는데 그것은 시보리가 험악하여 아무도 그와 키스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신사도 서포터즈들이 포옹해주었다.

“왜 제가 사랑 받는 것일까요? 아마도 내가 몇몇의 골을 기록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그 몇 개의 골은 세리아에서 5시즌동안의 투린에서의 155경기 93골이다. 그동안 3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이탈리안 컵을 우승하였다. 1978년 산 시로에서의 밀란을 상대로 성공한 헤딩골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탈리아 일요일 밤 축구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있다. 그 골에는 1959년 컵 결승에서 피오렌티나에게 승리할 때 넣은 골도 있다.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그는 헤딩을 하였다. 그는 헤딩을 하고서 공이 떠나는 것을 보고는 마치 강치가 서커스에서 비치볼을 가지고 놀 듯이 끄덕였다.

2001년 5월 존 찰스와 글렌다 찰스부부는 유벤투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는 델레 알피에 초청되었다. 그는 피치 가운데에 서서 관중들이 기립하여 엄청난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눈물이 떨어져 내 볼을 적시는구려.” 글렌다가 속삭였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진 앨범과 영상을 선물하네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칭찬을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충분한 재능을 타고난 것을 행운이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들도 이것을 즐기세요 라고 할 것이다.” 찰스가 덧붙여 “이 시간 이후로 나에게 이탈리아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멋진 일입니다. 그것은 이탈리아인들은 매우 친밀한 경향이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나에게 이와 같은 것들을 해주기 때문이다.”

칸토나를 발굴한 Rick Broadbent는 존 찰스의 이탈리아 생활을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는 찰스와 페기에게는 문화충격이었을 것이다. 투린은 다른 곳이고 축구 또한 찰스가 있었던 요크셔에서와는 다르다. ‘포워드로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는 매우 수비적인 축구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곳에서 득점을 한다면 그건 기적이다. 인기있는 포매이션은 1-8-2이고 전적으로 포워드는 사치품일 뿐이고 누구도 살 여유가 없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브리티쉬 언론은 찰스가 별 활약 없이 비틀거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또한 침착하여 쉽사리 흥분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이 신사가 과연 엄격한 주심과 시뮬레이션 액션을 서슴지 않는 선수들이 있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나타내었다. 찰스는 그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대부분의 주심들이 ‘호메로스’이며 그곳에는 항상 부패함이 만연하였다. 어느 이탈리아 클럽 회장은 모든 주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낌없이 돈을 썼다는 사실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들은 찰스가 powder puff tackling이라고 말할 만큼 육체적으로는 떨어졌지만 그들이 잉글랜드 초기의 축구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에 놀랐다. 또한 선수들은 몇몇의 애매모호한 행동을 하곤 하였다. 그들에게는 이미 거친 태클과 유니폼을 잡는 행위는 일상화되었다. 찰스는 이러한 스타일이 그들의 메리트라고 믿었다. ‘제발 그것들이 게임을 유치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게임을 거칠게 하도록 해서는 안 돼.’ 1962년 그는 이 말로 그의 느낌을 정리하였다: ‘유럽 대륙은 축구는 남자의 스포츠라고 받아들이겠지만 영국은 축구를 예술로 받아들일 것이다.’      

“찰스가 이탈리아에서 그러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지는 알기 힘듭니다. 그는 이탈리아 사회에 뛰어들었고 토리노 중심가에서 스테이크를 샀으며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항상 그가 외국인의 입장이 라는 걸 잊지 않았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곳의 서포터들은 매우 열광적이야.’, ‘외국에 산다면 그것은 당신은 나가서 주어진 새로운 삶을 즐겨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하는 외국어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매우 열광적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야, 매우 따뜻하고 이것은 웨일즈인들과 매우 닮아있지.’  





‘나는 원래 토리노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한거야. 내가 그곳에서 내가 이탈리아어를 하는 수준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선수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 나는 향수병에 걸렸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이겨내려 했고 그것을 즐겼지. 1961년에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를 수상한 오마르 시보리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팀에 합류한 것은 매우 멋진 일이었어. 우리는 서로 금새 친해졌고 그 다음에 우리는 주장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와 친해졌어. 그는 매우 환상적인 플레이어였지.’

“찰스와 시보리는 유벤투스에서 250골을 합작하였다. 그러나 찰스가 선호한 스트라이커 파트너인 ugly little bugger(시보리 별명)는 몇가지 문제를 겪고 있었다. 시보리는 마피아에게 그가 다음 경기에서 골을 넣는다면 쏘겠다는 협박을 받았었다. 시보리는 백헤딩으로 결국 득점하였고 스나이퍼의 총알이 두려워 팀메이트들은 그를 경호하는 형태로 둘러싸서 급히 경기장 터널 밖으로 내보내었고 그는 곧장 토리노로 날아갔다. 그동안 경기는 재개되었고 찰스는 골을 성공시켰으나 심판이 무효선언을 하였다. 찰스는 왜 골이 무효냐고 물었다. 심판이 말하기를: ‘나도 시보리씨처럼 집에 안전하게 들어가고 싶다.’  

“이러한 이탈리아 축구의 색깔은 찰스가 그의 클럽 첫 트레이닝 기간에 참가 할 때부터 알아차렸다. 그는 또 Citroen차를 사는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피아트 제국을 소유한 아그넬리가를 의식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모든 유벤투스 소속의 선수들에게 무료로 자동차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찰스는 3주만에 이탈리아를 정복하였다. 1957년 9월 8일 헬라스 베로나와의 그의 데뷔 경기에서 보니페르티와 시보리가 득점하여 2-2로 만들었고 찰스의 득점으로 승리하였다. 다음주에는 우디네제전에서 결승골을 작렬시키며 1-0승리를 이끌었고 다음에는 제노아전에서 중요한 골을 성공시키며 3-2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그의 첫 3경기에서 MVP에 선정되었다. Vittorio Fioravanti가 성취한 이후의 작은 기적이었다.”

“존은 ‘리즈에서 세컨드 디비전에서 승격한 이후 우리는 챔피언쉽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는 3번이나 챔피언쉽을 차지하였고 두 번의 컵우승을 달성하였다.’. 숨막힐 듯 답답한 수비수들과 이탈리아어로 ‘카테나치오’라 불리는 보수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는 곳에서 찰스는 3번의 해트트릭(아탈란타, 삼프도리아, 라치오)을 포함하여 34경기 28골을 성공시키며 그의 성공에 의문을 표시했던 이들을 단번에 깨버렸다. 이것은 그가 이탈리아 올해의 선수로 뽑히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풀햄에 Johnny Haynes는 연봉 5000파운드를 받으며 영국 최고의 연봉 수령자였다. 그가 받는 연봉은 40년후인 지금의 로이킨이 받는 그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찰스는 그의 마지막 시즌에 연봉 7000파운드에 상당한 양에 보너스를 받았다. 찰스는 ‘때때로 서포터즈들과 경기 후 함께 모여 그들이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주곤했다’고 회상하였다. ‘유벤투스를 이긴후 어느 로마플레이어는 300파운드의 보너스를 제공받았다. 회장은 인터밀란 회장과의 내기에서 이기면 각 선수들에게 500파운드씩 보너스를 주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영국과는 달리 이탈리아에는 연봉상한선이 없었다. 그리고 선수들마다 연봉이 천차만별이었다. 그곳은 또한 제계약에서 많은 돈을 벌수 있었다. ‘처음 이탈리아에 갔을땐 주급으로 18파운드를 받았다. 이는 리즈에서보다도 적은 돈이었다. 그러나 2000파운드로 제계약에 사인하였고 호화아파트도 받았다. 나는 행운아였다. 또다른 몇몇 클럽은 두달치나 밀린 그들의 월급을 받으려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선수들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해 열성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리즈와 토리노, 영국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영국의 클럽들이 회사의 제한을 받는 반면에 이탈리아 클럽들은 부유한 단장이 투표가 아닌 그들의 부유함으로 회장직을 유지하였다. 찰스는 이렇게 비민주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트레이닝 방식도 달랐다. 체력은 영국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러나 볼을 다루는 기술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주 내내 공에 굶주린 플레이어가 토요일 오후에 볼에 대한 집착으로 대단할 것이라는 것이 이론처럼 받들여졌다. 이탈리아에서는 ‘나는 자주 영국식으로 선수를 훈련시키는 것을 받아왔다 하지만 선수가 공에 굶주려 있다하더라도 막상 경기에서는 공을 다루는 것이 서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규칙은 찰스에게 또 다른 눈을 뜨게 해주었다. 1962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곳에 청소년들에게는 영국에서의 청소년들과 같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만약 10대의 연인이 극장이나 공원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서로 껴안고 있다면 경찰에 끌려가서 벌금을 물었다.’”

“우리는 이탈리아인들은 방탕하며 가죽자켓을 입고 운전할 때 인상을 찌푸리며 늙은 여성의 핸드백이나 훔치는 등의 행동이 빈번한 곳이라고 믿었다. 도덕이라곤 가망 없는 그런 곳 말이다. 하지만 Article Seven of the Football Clubs의 규정에는 선수들은 어디에서나 항상 올바른 매너로 행동해야하며 예의바른 도덕과 신체적인 삶을 살아야한다고 되어있다.
찰스는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총을 구입할 수 있었다. 가격은 매우 비쌌다. 그러나 그것을 잘 사용해야만 했다. 이것이 그곳에서 사는 교육이었다.’라고 하였다. 아마 이러한 법은 폴 개스코인이 90년대 초 도착하면서 철회되었을 것이다.”

유벤투스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존 찰스:유벤투스의 최고의 포워드’라고 되어있다. 거기에는“존 찰스의 힘을 회상할때면 훌륭한 형용사들이 떠오를 것이다.” 찰스는 가장 위대하였다.-재능뿐만 아니라-유벤투스 역사의 센터포워드에서 말이다. 월드 클래스의 스트라이커가 왔다 갔다. Farfallino라 불렸던 보렐, Bobby-go!라는 별명의 존 한센, 베테가, 호세 알타피니, 페트루쯔 아나스타시 그리고 파울로 로시등은 그들의 위대한 권한으로 마땅히 이곳에서 특별한 멘트를 받을 만 하다. 하지만 누구도 찰스와 같을 순 없다.

“1950년대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찰스의 플레이를 본 사람이라면 그는 전설이 될만한 자질을 갖춘 선수였다. 그가 골키퍼와 다른 동료선수, 두 명의 밀착된 수비선수들의 마크를 헛수고를 만들며 성공시킨 장면은 유명하다.  

“존 찰스는 엄청난 점프력 지닌 축복받은 선수였다. 마치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헤딩으로 골을 넣을 것인지 동료에게 패스할 것인지 결정하였다. 그의 이타적인 플레이는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팬들의 사랑은 찰스가 유벤투스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힘이 되었다. 토리노에서의 5년동안 유벤투스는 3번의 리그우승과 2번의 컵우승을 차지하였다. 찰스는 이탈리아 올해의 선수상과 58년과 59년에는 유럽 올해의 선수상에 3명의 후보선수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골까지 합쳐서 클럽에서 155경기 108골을 성공시켰다.

1960년 그는 34경기 23골을 성공시키며 유벤투스의 리그와 컵우승의 더블을 달성하는데 공헌하였다. 다음 시즌에는 32경기 15골을 넣으며 리그수성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떠났는가?

찰스는 “나의 아내가 돌아가길 원했어요. 저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었죠.”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는 좀더 자유롭게 가기 위해 떠날 이유를 생각했다. 그는 그의 아들의 교육문제를 들었다. 사실 아내는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이것이 토리노를 떠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영광의 4년 후 찰스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였다. 유벤투스에게 많은 압력이 있었지만 1년의 연장계약만 하고 이제 돌아간다고 선언하였다.  

찰스가 앨런드 로드로 돌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클럽은 다시 세컨드 디비전에 추락해있었고 이제 전 리즈 선수이며 찰스의 라이벌이었던 던 레비(Don Revie)가 팀을 이끌고 있었다. 리즈 구단은 서포터즈들로부터 그를 귀환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그를 데려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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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P.1974 Lv.13 / 1,861p
댓글 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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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
Giam Piero Boniperti said " if there was another John Charles anywhere in the world today I would carry him on my shoulders to Turin"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曰,

"오늘날 세계 어느곳에라도 또 다른 존 찰스가 존재한다면, 나는 내 어깨에 그를 올려서 토리노까지 대려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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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
잘읽었습니다. ^^
어느정도평가를 받았는지는 실감이 안났지만
홈구장 복구비 이상의 이적료를 받았다니..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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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
리즈가 오랜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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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알레
2006-03-01
이름: John William CHARLES
국적: Wales
출생일: 1931년 12월 27일
(사망일: 2004년 2월 21일)
태어난 곳: Swansea
신체조건: 186cm/88kg
포지션: FW
데뷔경기: 50/3/8 vs North Ireland
국가대표: 38출전 15골

SEASON CLUB GAMES GOALS
1948/49 Leeds United 3 0
1949/50 Leeds United 42 1
1950/51 Leeds United 34 3
1951/52 Leeds United 18 0
1952/53 Leeds United 40 26
1953/54 Leeds United 39 42
1954/55 Leeds United 40 11
1955/56 Leeds United 41 29
1956/57 Leeds United 40 38
1957/58 Juventus 34 28
1958/59 Juventus 29 19
1959/60 Juventus 34 23
1960/61 Juventus 32 15
1961/62 Juventus 21 8
1962/63 Leeds United 11 3
Roma 10 4
1963/64 Cardiff City 11 3
1964/65 Cardiff City 28 3
1965/66 Cardiff City 7 4
1966/67 Hereford U. * *
1967/68 Hereford U. * *
1968/69 Hereford U. * *
1969/70 Hereford U. * *
1970/71 Hereford U. (243) (130)

로마에서도 뛰셨던 분입니다. 정착한 팀에선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말그대로 변하지않는 클래스를 지닌 선수셨죠.
쨋든,에이디피님 잘 읽었습니다.^^ 추가 도움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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