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8일 20시 43분

팀 : 유벤투스

소속 : 세리에 A

주장 : 비르지니오 로세타

핵심 멤버 : 루이스 몬티, 지오반니 페라리, 라이문도 오르시

감독 : 카를로 카르카노

성적 : 1930~1935 세리에 5연패, 1934년 월드컵 우승

 

세리에 5연패라는 기록은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그란데 토리노라 불리는 그 시기와, 그란데 유벤투스였던 시기를 제외하고 5연패를 달성한 팀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우승을 한 인테르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 기록도 지난시즌 유벤투스가 기적같은 우승을 일궈내며 세리에 5연패를 달성했고, 올 시즌 그란데 토리노도, 그란데 유벤투스도, 트레블을 한 인테르도 달성하지 못한 세리에 6연패를 향해 순항하고 있다. 유벤투스가 새로운 기록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렇다면 1930년대 세리에 5연패를 했을 때의 감독은 누구이며, 어떤 선수들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점에서 이 글을 시작했다. 기간이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인 1930년대라 자료도 굉장히 적지만, 이탈리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남겨준 기록 덕분에 많이 찾아냈다.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다. 

 

 

 

골키퍼, 지암피에로 콤비

지암피에로 콤비는 1902년 11월 20일 토리노에서 태어나 21살에 나이로 유벤투스에 입단한다. 그의 데뷔는 1922년 2월 5일, 밀란과의 경기였다. 유벤투스에서 데뷔하고 유벤투스에서 은퇴한 콤비는 총 351경기를 뛰었으며 26년에는 시즌중 18골만 허용하는 놀라운 수비력을 보여주었고, 콤비의 활약을 밑바탕 삼아 유벤투스는 1930년부터 1935년까지 Il Quinquennio d' Oro 로 알려져있는 전무후무한 세리에 5연패를 달성을 하지만 지암피에로 콤비는 1934년에 은퇴하여 세리에 4연패까지만 남아있었다. 

 

이러한 훌륭한 골키퍼 앞에는 비르지니오 로세타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가 버티고 있었고, 같은 국적의 세 선수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수비트리오로 불렸다. 콤비는 1934년 4월 15일 브레시아를 2대1로 이긴 경기를 마지막으로 유벤투스에서 선수생활을 은퇴한다. 총 13시즌동안 유벤투스에서 선수생활을 한 콤비는 세리에 368경기 출장과 중부 유럽대회를 16경기 출장을 했고, 4차례 연속 유럽대회 준결승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에 디노조프가 총 476경기를 세우며 추월하기 전까지 약 40년이라는세월이 걸렸으며, 이후 1980년에는 스테파노 타코니가 386경기를 세우며 콤비의 기록을 추월, 2000년대에 와서는 지안루이지 부폰이 그 기록을 넘어섰고, 부폰은 아직까지도 현역이다.

 

콤비의 이탈리아 국가대표 첫 데뷔경기는 헝가리와의 경기였고, 7대1 참패였다. 이후 콤비는 새로운 기술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국가대표에 소집이 되지 못하다가 3월 22일 토리노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다시 복귀한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7대0으로 이겼는데, 콤비는 이 경기를 시작으로 골대쪽으로 뒤돌아 본적이 없었다. 콤비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참가하여, 8강전 스페인 격파, 4강전 우루과이에게 패배, 이집트와의 3위 결정전에서 승리하며 동메달을 따냈다. 콤비는 1931년 자신의 33번째 국가대표 경기에서 주장직에 오르며 1934년 월드컵에 나선다. 

 

1934년 초반 콤비는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벤투스에서는 이미 5번째 세리에 우승과 세리에 4연패를 달성했었고, 국가대표에서도 40경기 이상을 소화했다. 또한 유망주 골키퍼로 카를로 세레솔리가 등장을 했는데 그의 데뷔전은 밀라노에서 그리스를 4대0으로 이긴 경기로 아주리군단에 오를 자격이 됐었고, 콤비와는 대조적인 데뷔전을 치뤘다. 하지만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비토리오 포쪼는 나머지 한자리에 콤비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콤비의 국가대표 경험이 필요했던 포쪼는 그에게 은퇴를 연기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월드컵 시작하기도 전에 훈련에서 세레솔리가 팔뚝이 부러지는 사고가 터지면서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게 됐고, 콤비는 어쩔수 없이 마지막 대회를 치르게 됐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파죽지세였다. 안젤로 시아비오의 헤트트릭, 라이문도 오르시의 멀티골, 지오반니 페라리와 주세페 메아짜의 골까지 더해져 도합 7대1로 미국을 완파했고, 8강에서 위대한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가 지키는 스페인과 맞붙었다. 첫 경기는 1대1 무승부로 끝나면서 2차전을 치르게 됐고, 2차전에서 메아짜의 결승골로 1대0 승리를 거머쥐며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이미 이탈리아를 4대2로 격파한 경험이있었다. 하지만 산시로에서 열린 4강전에서 이탈리아는 엔리코 과이타의 결승골로 1대0 승리를 거두며 결승전에 진출했고, 이 경기에서 콤비는 결정적인 선방을 두 차례나 보여주며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결승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였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안토닌 푸츠에 의해 골을 먹혔지만 후반전 라이문도 오르시가 동점골을 넣으며 승부는 연장으로 직행, 안젤로 시아비오의 결승골이 터지면서 이탈리아는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콤비는 510분간 뛰면서 단 3골을 허용하며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됐고, 무솔리니에게 Jules Rimet이라는 트로피를 받았다. 10년동안이나 아주리군단의 골문을 지켰던 콤비가 떠나고 78년 디노조프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주리 군단의 골문을 10년동안이나 책임진 선수는 없었다. 

 

콤비는 5년간 아주리군단의 주장으로 있으면서 총 47경기를 소화했고, 축구선수로써는 은퇴했지만 유벤투스에 남아서 비공식적인 일을 맡기도 했다. 기술위원회로도 있었고, 스카우트로도 있었던 콤비는 1951년에는 아주리 군단의 기술위원직 자리에 앉게 된다. 그후 56년 암페리아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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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수, 비르지니오 로세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베르첼리에서 태어난 로세타는 베르첼리에서 선수생활을 하기전 Propaganda Section이라는 스포츠 팀을 만들었는데 로세타는 여기서 나중에 유벤투스와 아주리 군단의 팀 동료가 되는 움베르토 칼리가리스를 만나게 된다. 이후 나중에는 공부를 위해 밀라노로 이사를 갔고, 네라쭈리 유스에서 잠시 활동하기도 했었다. 로세타는 얼마 않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축구를 했는데 거기서 프로 베르첼리의 스카우터들에게 눈에띄었고, 17살의 나이에 1부리그 데뷔를 한다. 그리고 첫 시즌 25경기에 출장하여 7골을 기록을 하면서 데뷔전부터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고, 1923년 유벤투스의 눈에들어 토리노로 둥지를 옮긴다. 

 

로세타는 1923년 유벤투스로 옮기며 처음으로 축구선수로써의 급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마는데, 비안코네리가 대회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로세타는 당연히 출전을 했다. 하지만 베르첼리 쪽에서 이적 동의 없이 로세타를 출전시켰다는 이유로 태클을 걸었고, 이로 인해 로세타가 뛸 경기를 모두 취소시키는 일명 Rosetta case 사건이 발생을 한다. 연방 이사회의 국장이자 밀라노의 변호사인 Ulisse Baruffini는 로세타를 3경기만 출전시키게 한다고 발표를 했고 토리노 쪽에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 사건은 후에 베르첼리가 이적을 공식화하면서 해결이 됐다. 이후 로세타와 유벤투스는 승승장구를 달리며 세리에 5연패를 달성했고, 로세타는 33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에서 총 338경기를 소화했다.

 

피아몬티에서 태어난 칼리가리스는 지역팀 AS체살레에서 1919년에 데뷔하여 28년 유벤투스로 이적하기전까지 9년동안 선수생활을 했다. 그의 데뷔경기는 지역 라이벌팀을 3대1로 이긴 경기였다. 그가 뛰고있던 체살레는 세리에가 출범하기전 이탈리아 리그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팀이었다. 하지만 체살레는 그 이후로 우승을 한 적이 없었고, 칼리가리스는 별다른 성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1922년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칼리가리스를 콜업, 데뷔를 시킨다. 칼리가리스는 아주리 군단에서 비르지니오 로세타와 우측 수비수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했다. 물론 칼리가리스와 로세타 둘다 출전을 했고, 이들은 지암피에로 콤비와 함께 28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다. 

 

그리고 유벤투스는 칼리가리스를 체살레에서 영입을 하면서 로세타와 수비라인을 형성하게 했고, 아주리 군단의 막강한 수비라인을 모두 갖게 된 유벤투스는 세리에 5연패를 달성한다. 칼리가리스의 데뷔전은 나폴리를 3대2로 이긴 경기였다.  1934년에 오스트리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칼리가리스는 총 59경기를 소화했고, 이 기록은 1971년 인테르의 레전드 지아친토 파케티가 나타나기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칼리가리스는 1939년 10월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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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세타, 콤비, 칼리가리스) 

 

 

 

 

 

미드필더, 지오반니 페라리, 루이스 몬티

페라리는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923 년 프리마디비전 현지 클럽인 알레산드리아라는 축구 클럽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929 년 10 월 6 일 새롭게 출범한 세리에 A에서 데뷔를 했다. 그는 1925-26 시즌 동안 인터내플레스로 임대를 갖다온것을 제외하고는 1930 년까지 클럽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알레산드리아와 인터내페를레스에서 총 7년동안 뛰면서 122경기를 소화했고 78골을 기록했다. 이후 페라리는 유벤투스의 눈에 들어 유벤투스로 이적을 했고, 총 125경기에 출장하면서 35골 정도 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그는 경기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선수였다. 

 

공식적인 등번호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추되고 있다. 페라리는 1935년 유벤투스의 5연패를 달성한 후 인테르로 옮겨 40년까지 뛰다가 볼로냐로 이적 후 다시 유벤투스로 복귀했다. 이후 페라리는 은퇴를 했고, 이후 인테르 코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아주리 군단 코치까지 하게 된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는 주세페 메아짜, 에랄도 몬젤리오와 함께 월드컵을 제패했고, 실비오 피올라와는 중부 유럽대회를 거머쥔다. 

 

이탈리아에서 뛴 선수중 루이스 몬티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피가섞인, 즉 오리운디중 한명이었다. 몬티는 1921년 삼촌의 영향때문에 Huracán로 팀을 옮겼는데 한시즌만에 다시 팀을 옮겼고, 산 로렌조라는 팀으로 옮긴다. 산 로렌조에서 9시즌동안 뛰면서 202경기 40골을 기록했고,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1931년 7월 이탈리아 유벤투스로 팀을 옮겨 35년까지 총 세리에를 연속으로 우승했으며, 30년부터 시작했던 이들의 우승은 35년 5연패로 정점을 찍었고, 몬티는 5연패 하는동안 주축 멤버였다. 그는 유벤투스에서 총 7년간 뛰었고 263경기 22골을 기록하여 성공적인 이탈리아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서 37세의 나이로 프로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38년부터 47년까지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등 아마추어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Eh9gImW.png(루이스몬티, 지오반니 페라리)

 

 

 

 

 

공격수, 라이문도 오르시

1919년 11월 아르헨티나 챔피언십에서 데뷔한 라이문도 오르시는 1928년까지 인디펜던트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오르시는 1928년 우루과이와의 올림픽 결승전에 아르헨티나 대표로 출전했다. 이 올림픽을 유심히 지켜본 아넬리 가문이 오르시가 눈에 들어왔고, 이들은 어떻게든 오르시를 데려오려 했다. 급료 때문에 협상이 어려웠던적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데려오긴 했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오리운디 정책을 내걸기 전이어서 바로 출전을 하지 못했고, 오르시는 29/30시즌부터 경기에 나설 수 있게 됐다.

 

1930년부터 35년까지 유벤투스의 세리에 5연패 주역이 되면서 명성을 쌓았고, 그는 177경기를 소화하며 77골을 기록했다. 오리운디 정책이 안정화되자 오르시는 이탈리아 어느지역에서도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됐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으로도 콜업이 된다. 그의 데뷔경기는 포르투갈과의 경기였다. 그리고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골을 기록했고, 그중 한골은 결승전에서 기록,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됐다. 이후 35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39년에 선수생활을 은퇴한다. 

 

현대 축구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오르시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을 소화할수가 없다. 왜냐면 이미 1928년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 대표로 출전했기 때문에 지금시대로는 당연히 불가능한데, 그때 오리운디 정책과 국적선택에 대한 내용이 어땠는지 정확히 모르는 터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오르시는 어찌저찌해서 이탈리아 국가대표 팀으로도 출전,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국가대표 기록은 아르헨티나인으로는 12경기 3골, 이탈리아인으로는 35경기 13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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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에 5연패, 그리고 월드컵 우승까지

감독인 카를로 카르카노와 함께 유벤투스와 이들은 세리에 5연패를 달성했다. 당시 토리노는 5연패 당시 전술은 2-3-5 였는데, 유벤투스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쿼드를 보면 수비수가 최대 6명, 최소 3명인걸 보면 수비수 2명만 두는 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비수가 2명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명은 로세타와 칼리가리스라는 뛰어난 수비수 였고, 그 뒤에는 지암피에로 콤비라는 훌륭한 골키퍼가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유벤투스와 국가대표에서도 모두 함께 다녔으며 세리에 연속우승과 월드컵 우승을 함께 달성했다. 이러한 수비라인은 트라파토니의 조프, 시레아, 젠틸레도 그러했고, 현재 부폰, 보누치, 키엘리니등도 그러하다. 이 5연패 이후 유벤투스가 다시 스쿠데토를 따는데 걸린 시간은 약 20년이었다. 잉글랜드 감독 카버와 욘 한센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벤투스는 2차대전과 그 영향으로 한동안 이탈리아 왕좌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제 위대했던 과거의 선수들을 뛰어넘어 유벤투스는 현재 세리에 6연패라는 대기록을 남기고 있다. 리그 폐막이 얼마 남지 않았고, 유벤투스는 챔피언스리그 4강전 2차전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가 모두 놓칠 수도 있다. 세리에 5연패 이후 70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올 시즌 유벤투스의 리그 기록은 5연패로 끝이날까 6연패로 끝이날까

 

 

 

 

PS: 와 기록 찾느라 죽는줄 알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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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베의심장부폰 Lv.31 / 13,025p
댓글 6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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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8
저 시기에 이루지 못했던 6연패를 드디어 목전에 두고 있으니 감격스럽네요 ㅠㅠ
유벤투스 역사글부터 글 다 잘보고 있습니다! 늘 유익한 글 써주셔서 감사해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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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8

유심붚 당신은 대체....

이분 걸어다니는 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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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8
흠 글읽으면서 이번 5연패의 주역 5명을 뽑아보고 싶었으나 5연패를 모두 겪은선수가 몇 없네요;; BBBC 리히 맑뿐인가

여기 위에 나열된 선수들중에도 몇 없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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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8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과거 30년대 5연패 멤버에 관한 기록 찾는데 꽤나 고생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35년 월드컵은 파시즘의 영향아래 꽤나 말이 많던 월드컵이라서 높게 평가하진 않지만 그래도 당시 유벤투스 황금멤버들이 상당히 많이 포진되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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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캬 이런 역사책은 얄짤없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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